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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윤-단편소설2(200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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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노상윤
“약 드시고 취침하실 시간입니다.”
수면제였다.
“두고 가.”
“드시는 걸 확인해야 됩니다. 군의관 지시 사항 입니다.”
이병 계급장을 단 앳된 얼굴의 위생병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주는 캡슐을 혀 밑에 단단히 밀어 넣곤 투명 플라스틱 컵에 든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지켜본 이병이 불을 끄고 나갔다. 손에 캡슐을 뱉어냈다.
손목시계의 야광 바늘은 자정을 막 넘기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익숙한 소음과 진동이 느껴졌다. 목을 천천히 좌우로 돌렸다. UH-60 헬리콥터 내부였다. 12개의 좌석 대신 그물로 만든 이층 침대가 좌측과 우측에 있었다. 나는 좌측 침대 이층에 뉘어져 벨트로 묶여져 있었다. 우측 이층 침대의 위는 비어 있었고 아래는 군용 담요로 얼굴을 덮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몸에 감각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비명을 질렀다.
“진정해. 이제 다 왔어.”
항공 헬멧을 쓴 승무원이 다가와 내 상체를 눌렀다.
“김 중위는 어떻게 됐소?”
“우린 누가 누군지 몰라. 구조대가 데려오는 데로 실어 나르니까......”
“나와 로프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럼 저기 있는......”
“아냐, 실을 때 봤는데 중사던데. 엘리뇨란 놈 땜에. 그 빌어먹을 산꼭대기는 강풍에다 눈보라에 헬기가 접근할 수 없었어.”
“......”
나는 헬기로 ◯군 병원으로 이송되어졌다. 방송 시청이나 면회, 전화 이 모든 것들이 금지되어 있었다. 4인용 병실을 나 혼자 사용했다. 동상에 걸린 손발이 몹시 가려웠다. 아침이 되자 부대장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괜찮아, 누워 있어. 몸은 어떤가?”
“견딜 만 합니다.”
“내일 부대장으로 영결식을 할 거고 사망자들은 모두 일 계급 특진이야. 그들의 불굴의 군인 정신은 군이 존재하는 날까지 영원 할 걸세. 특히 부하를 두고 갈 수 없어 껴안고 생사를 같이한 삼 중대장 고 대위나 판단 착오로 부대원들에게 무리한 행군을 진행시킨 죄책감에 대원들을 하산시키고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행군을 유도 한 정찰 중대장 김 중위는 진정한 군인 아니, 군신이라 할 수 있지.”
부대장은 군인 정신, 판단 착오, 군신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
“영결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 될 텐데, 수고 해주게.”
“......”
“부관이 하는 말이 우리가 작성한 <조난 보고서>에 대해 자네가 이견이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불만이 있으면 내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보게.”
우리라는 말에 나는 그만 마음이 격해졌다.
“대체, 우리란 누굽니까? 그 보고서의 내용은 군의 의견입니까? 별들의 의견입니까? 부대장님의 의견입니까? 당시 그곳에 있었던 부대원들의 의견입니까? 아니면 관련된 모든 이들의 희망 사항입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사, 일은 벌어졌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해.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특히 자네 자신을 위해서.”
“저를 위해서요?”
“구조대가 자넬 발견했을 때 허리에 로프가 감겨 있었네. 그 곳에서 불과 사십 미터 위쪽에 김 중위가 잘려진 로프를 허리에 감은 채 죽어 있었고.”
음모의 냄새가 맡아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김 중위와 난 산 정상에다 모든 장비를 버렸습니다. 그럼, 그때 던져 버린 탄띠에 달렸던 대검이 발이라도 달렸다는 겁니까?”
“정말 그럴까? 우린 탈진한 상태에서 동료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김 중위 스스로 끈을 끊은 것이라 생각하네. 참다운 희생정신을 보여준 거지. 자넬 살린 김 중위를 위해 이번엔 자네가 우릴 도울 차례야. 부관이 내일 방문하면 작성된 자술서에 자넨 서명만 하면 되네. 앞으로 여기저기서 귀찮게 굴겠지만 염려 마. 자네 뒤엔 우리가 늘 함께 할 거야.”
부대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손짓으로 제지하며 문득 생각난 듯 들고 있던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우리가 주는 선물일세.”
목을 꼿꼿이 세운 부대장이 한마디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상자를 열자 끊어진 두 개의 로프와 대검이 한 자루 들어 있었다. 대검 손잡이에는 김 중위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칼집에서 대검을 뽑았다. 검푸른 빛의 대검은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 침대 밑에서 수첩을 꺼냈다. 적어도 4시간 동안은 방해 받지 않을 것이다. 침대에 앉아 비상등의 붉은 불빛에 의지해 볼펜을 들었다.
정기 종합 전술훈련의 핵심인 천리 행군 시작을 알리는 군악대의 경쾌한 행진곡 연주가 시작됐다. 연병장에 완전군장으로 집합한 부대원들 사이를 오가며 측정관들이 군장 검사를 했다.
이 훈련은 부대별로 성적이 집계되어 보고가 올라가게 되어 있어 부대장이 가장 신경을 쓰는 훈련이었다. 사격, 침투, 폭파, 행군 등등의 훈련들이 줄지어 있었다. 훈련 마지막 일정인 천리 행군은 새벽에 산 속에 비트를 만들고 낮에는 비트에서 자고 밤에는 산을 타는 훈련으로 경험 많은 고참들도 바짝 긴장하는 훈련이었다.
떠도는 소문엔 사령관이 이번 행군을 ‘◯대간첩 사건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극한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을 연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며 행군 지역을 전보다 험한 곳으로 정하고 코스별 훈련도 강도 높게 설정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물먹으면 계급 정년에 걸려 전역해야 하는 부대장도 이번 훈련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소문이 부대 내에 파다했다. 우리 부대와 라이벌 관계인 ◯부대 부대장은 우리 부대장의 육사 후배인데도 정치권과 줄이 닿아 이번에 유력한 진급 케이스라는 것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훈련을 끝낸 ◯부대 성적은 작년보다 크게 앞섰다. ‘남과 똑같이 해서 남보다 앞서리라 기대하지 마라.’부대장이 행군 전 준비 상황을 직접 확인하며 대원들에게 하는 말인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말끝마다 붙이는 경구였다.
“이거 죽을 노릇이네.”
“산 넘어 산이군. 위에서 포위망을 너무 일찍 풀게 해 토끼들이 도망간 것을 우리 실력이 부족해서 못 잡은 것으로 몰고 가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강 하사 그 녀석. 요즘도 가끔 꿈에 나타나.”
한숨쉬며 말하는 임 하사의 말을 들으니 체대 다니다 하사로 자원한 큰 키에 새우 눈을 늘 깜박거리던 강 하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수함으로 침투한 적들을 소탕하기 위한 ‘◯대간첩 작전’ 끝물 이였다. 육군본부에서는 일명 ‘토끼몰이 작전’을 폈다. 적이 있을 법한 산 주변에 육군과 전투경찰을 동원해 원형 포위망을 만들었다. 몰이꾼이 사냥감을 산 위로 몰며 올라오면 우리 중대는 헬기로 산 정상에 하강해 매복하거나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며 적을 소탕했다.
작전 16일 째, UH-60 수송 헬기에 탄 우리 중대는 3중대가 탑승한 헬기와 함께 좌표: TD-2875R 지역을 선회하며 몰이꾼들이 올라오는 것을 지켜봤다. 무전으로 통신을 주고받던 김 중위가 소리쳤다.
“본부, 토끼 두 마리 발견. 육 부 능선에서 정상으로 뛰고 있다.”
“정상에 정찰 중대 애들을 레펠링 시켜. 삼 중대는 엄호하며 대기 해.”
다른 주파수로 들어 온 듯 심한 잡음과 함께 들리는 목소리는 부대장 그였다. 이 상황에서 레펠링 하는 것은 궁지에 몰린 배고픈 개구리가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바로 위로 파리가 한 마리씩 줄을 타고 내려가는 것과 같았다.
“부대장님, 산 후사면에 백호 사단 수색 소대가 매복 중입니다. 토끼가 내려갈 때 수색 소대 애들이 잡으면 됩니다.”
“그건 내 꺼야. 우리 토끼를 딴 놈한테 내 줄 수 없다. 정상에서 잡아라. 통신 끝.”
“......알겠습니다.”
김 중위는 조종사에게 손짓으로 하강 신호를 보냈다.
“내가 먼저 간다.”
김 중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중위님 제가 이미 하강기에 로프를 연결했으니 다음 차례로 오십시오.”
출입문 하강기 옆에서 경계를 보고 있던 강 하사가 로프와 스냅링을 연결해 빠르게 내려갔다. 나는 하강기 옆에서 K-1 자동소총으로 엄호 사격 자세를 취했다. 헬기 뒤쪽에서 양철 지붕 위로 우박 쏟아질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강 하사의 몸이 꿈틀했다. 로프가 끊어졌다.
“사격 받고 있다. 다섯 시 방향.”
헬기가 급선회했다. 조종사가 비명을 질렀다. 하강을 위해 안전띠를 풀었던 나는 헬기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지막 기억은 3중대가 탄 헬기가 출입문에 장착된 기관총을 난사하며 선회하는 모습이었다. 5발마다 한발씩 들어 있는 예광탄의 붉은 궤적이 끝없이 이어졌다. 산 정상에 붉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후송된 나는 열흘간 ◯◯군병원에서 뇌진탕과 금이 간 왼쪽 어깨의 치료를 받은 후 중대로 돌아왔다. 3중대장 고 중위는 표적을 찾지 못했던 헬기 기총 사수를 밀쳐 내고 출입문에 장착된 기관총을 직접 사격해 산산조각 난 토끼 한 마리를 잡은 공로로 일 계급 특진에 포상 휴가 중이었다. 김 중위에게 복귀 신고했다.
“수고 많았어. 체력 훈련 확실히 해서 곧 있을 전술 훈련 받는데 차질 없도록 해.”
그의 표정은 몹시 침울했다. 나는 내무반에 돌아가 중대원들을 만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재주는 뭐가 부리고 챙기는 건 뭐가 챙긴다더니. 김 중위가 총대 맸어.”
“뭔 소리야?”
나는 PX에서 산 음료수 캔을 중대원들에게 돌리며 물었다.
“김 중위가 하강 명령을 내린 걸로 처리됐어. 포상은 부대장과 3중대장이 받고. 나 같으면 육본 조사위원회에서 나왔을 때 한번 뒤집어 놓았을 텐데.”
끊었던 담배를 다시 시작한 듯 뻐끔거리며 서 중사가 말했다.
“그때 내려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데 토 달 놈은 없을 거야. 김 중위가 먼저 내려갔어야 하는 거 아냐. 우리 모두 그렇게 배웠잖아요?”
박 하사였다.
“쓸데없는 소리, 그때 모두 봤잖아? 강 하사가 자원한 거지. 김 중위가 등 떠민 건 아니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내 서슬에 따지는 투로 말하던 박 하사가 움찔했다.
“근데 김 중위 그 성격으로는......”
“그러게, 중대장들 중 혼자 알티 출신이니 걸레 빠는 일은 다 넘어올 것 같아. 김 중위 그 사람 ‘까라면 예 하고 까는 식’이니.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판단해 싸울 땐 싸우고 막을 건 막아 주고 해야 되는데...... 저런 타입은 부관이나 참모가 제격이지, 현장 지휘관 타입은 아냐.”
강 하사의 사수였던 이 하사가 다 마신 콜라 캔을 휴지통에 던지며 투덜댔다.
“소가 뒷걸음치다 생쥐 잡은 격이지. 손바닥 만 한 야산 꼭대기에다 엠 육공으로 사백 발이 넘게 난사해 쑥대밭을 만들었는데 뭔들 못 잡겠어.”
“토끼들도 대단해. 구형 엠 씩스틴으로 레펠링 하던 애한테 세 발을 쏴서 몽땅 머리에 맞추다니. 그 중 한발은 로프도 끊었잖아. 하강시간이 삼~사초 정도니 조준하는데 일초 여유밖에 없었을 텐데.”
침울한 표정인 정 상사의 말을 끝으로 입을 여는 중대원은 없었다.
그 날 저녁 나와 김 중위는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부대 근처에 있는 국밥집에서였다. 구석 자리에 앉아 한동안 말없이 소주만 들이켰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번 작전에 대해 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포위망이 계속 뚫렸고 결국 토끼 두 마리는 놓쳤지. 인명 피해도 크고. 대원들 사이에 이런 저런 얘기가 많겠지. 나도 알아.”
“저희야 중위님을 믿죠.”
손짓으로 소주를 한 병 더 시키며 남은 술을 그의 잔에 가득 부었다.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내가 먼저 내려갔어야 했어.”
‘전시에 낙하는 가장 계급이 높은 자가 가장 먼저 뛰어내리는 것이 불문율이다.’ 첫 공수 교육 때 암팡진 체구의 낙하 교관이 말했다.
“지나간 일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특히 사고 뒤에는.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저번 산악 구보 훈련 때 중사가 같이 뛰어 준 전우의 끈 기억나지? 강 하사가 하강하는 것을 보며 그 생각이 났어. 총 맞고 떨어지는 것보다 내가 더 놀란 것은 로프가 끊어진 거야. 강 하사 다음이 나였잖아. 그와 내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다음엔 내가 먼저야. 자네도 분명히 알아두라고.”
“......사실 지금에서야 말씀드리지만 그땐 부대기가 딴 중대로 넘어갈 것 같아 대원들 모두 조마조마 했죠.”
김 중위와 친해지게 된 데는 산악 구보에 약했던 그를 개인 지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나와 동갑이기도 했다.
여름 햇살이 따갑게 얼굴을 찌르는 일요일 오후였다.
“똑바로 하십쇼. 이래 갔고 측정 통과는 어림도 없습니다.”
부대 입구에서 산악 훈련장까지 전력 질주로 땀범벅이 된 김 중위에게 나는 쏘아붙였다. 부대원들 중 선발된 우리 정찰 중대가 이번 산악 구보 측정에서 타 중대에게 뒤진다면 ‘최우수 중대’라는 붉은 부대기를 한번도 다른 중대에 양보하지 않은 우리 중대로선 수치였다.
80년도 초 까지만 해도 계급에 상관없이 처음 들어오면 부대원들이 막내 하사와 태권도 대련을 붙여 승패나 승부 근성에 따라 대접을 해주던 부대의 전통은 이제는 엄격히 금지됐으나 우리 중대에선 강도가 약해졌을 뿐 그 전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중대원들의 평가 결과 진급해서 사령부로 영전한 최 대위 후임으로 부임한 신임 중대장 김 중위는 산악 구보 실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지적됐다. 그런 그를 중대 최고참 하사관인 정 상사가 지도 하게 정해져 있었으나 그가 두 달간 해군 UDT에서 수중 폭파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나는 바람에 내가 맡게 됐다. 김 중위가 ROTC 출신임에도 대부분 육사 출신들로 채워져 있는 우리 부대에 자원해서 왔다는 것을 동기 중사 모임의 술자리에서 인사계에게 들었다.
“그 친구 부대장 면담 때 시간 때우고 제대하면 되는 반쪽 장교가 여기 뭐 하러 왔냐니까. 말씀하신 데로 어차피 국방부 시계는 가는데 추억 거리를 남기기 위해서 물 좋은 보급계 걷어차고 이리로 자원했습니다, 하더군.”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같이 땀 흘리며 부대끼다 보면 상대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법이다.
“제한 시간 한 시간. 모든 중대가 이곳 훈련장 입구에서 감독관에게 군장 검사를 받고 동시에 출발합니다. 지정된 산길 십 킬로미터를 가장 빠르게 들어오는 중대가 우승입니다. 중대원 중 가장 늦게 들어오는 녀석의 시간이 중대 전체 기록이 됩니다. 문제는 중위님 기록이 열 두 명 중 꼴찌에다 제한 시간대인 오십 팔 분대라는 것입니다. 제 말 중에 틀린 점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정확한 분석이군. 그래서 휴일에도 개인 훈련을 하잖아. 같은 중대원인 자네가 함께 해준다니 고맙네. 중사.”
김 중위는 손바닥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야전 배낭을 열고 5미터 길이로 자른 로프를 꺼냈다. 허리에 스냅링을 연결했다.
“이건 ‘전우의 끈’이라 부릅니다.”
“전우의 끈?”
“신참이 구보 훈련 때 고참과 줄을 연결해서 같이 뛰는 것인데 저도 5년 전에 이렇게 훈련해 첫 측정을 무사히 끝냈습니다.”
그는 내가 내미는 로프에 연결된 스냅링을 자신의 탄띠에 연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출발하게, 중사 .”
그렇게 산악 구보 훈련을 거듭한 뒤 본 측정에서 우리 중대는 부대기를 지켰다. 김 중위는 때마침 중대마다 한 벌씩만 지급돼 통상 중대장이 가지게 되는 신형 방한 잠바를 내게 양보했다.
적 후방에 침투해 중대 단위로 행동을 하는 우리 부대는 개인의 주특기와 동료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유지됐다. 각 중대는 장교1명에 하사관 11명으로 편성됐다. 하사관은 전문 분야인 주특기와 부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부특기는 주특기를 가진 대원이 임무 수행이 불가능해질 경우 그 일을 대신하기 위해 필요했다.
내 주특기는 의무였다. 불빛 하나 없는 첩첩산중에서 손전등과 면도칼 하나로 응급 외과 수술을 할 수 있다. 부특기는 통신으로 만일 통신 담당 임 하사가 쓰러지면 내가 그 일을 맡고 내가 운이 다하면 폭파 주특기를 가지고 있는 서 중사가 의무를 대신 할 수 있게 훈련 받았다.
작은 키에 항상 검정 선글라스를 쓰는 부대장의 입버릇처럼 ‘적지에서 지휘차 몰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똑같이 훈련 받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계급보다 각자 주특기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중시됐다. 장교들은 처한 상황에 따라 해당 주특기 하사관의 의견을 반영해 작전을 지휘했다.
술병은 쌓여 갔고 술국은 식었다. 술은 이래서 좋다. 서로의 이해관계나 생각을 스스럼없이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 술자리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말했다.
“또 그런 일 있으면 제가 먼저고 끈도 끝까지 이어 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약속합니다.”
“정말인가?”
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하하, 그럼요. 그만 일어나시죠.”
군장 검사가 끝나자 선임 측정관이 서류철에 시간을 기록하고 행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이번엔 저번하고 많이 달라. 이 악물어야 할 거야. 자, 출발.”
김 중위의 말을 끝으로 행군이 시작됐다. 부대 정문을 지나 출발하는 부대원들에게 군악대가 군가 ‘진짜 사나이’로 환송해 주었다.
우리 중대는 정찰 중대라는 명칭에 걸맞게 선두에 섰다. 본대와 통신을 유지하며 산을 타고 넘었다. 3월 중순의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산속은 아직 겨울이었다.
나는 휴식 시간에 중대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행군 일정을 빡빡하게 잡은 데다 본대보다 앞서가야 했기에 대원들의 피로가 빨리 왔다. 대부분이 가벼운 몸살 증세를 보였다. 나는 대원들에게 6시간마다 해열제 2정씩을 복용케 했다.
목적지인 산의 7부 능선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6인용 비트를 50미터 간격으로 2개를 만들기로 한 중대장 결정에 따라 대원들은 비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김 중위와 나는 작업하는 대원들을 한 명씩 불렀다. 훈련이 심해지면 흔히 신참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에도 강 하사 후임으로 온 유 하사가 골칫거리였다.
“유 하사, 젖은 양말 갈아 신지 않았지?”
나는 유 하사에게 바싹 당겨 앉으며 군화를 벗어 보라고 했다. 유 하사의 양 발바닥에는 한 군데 씩 자두 크기의 물집이 잡혀 있었다.
“양말 여분 있나?”
유 하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김 중위가 배낭에서 양말 한 묶음을 꺼내 건네주며 자주 갈아 신으라고 했다. 나는 물집과 상처를 소독해 줬다. 비트 작업을 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가는 유 하사의 뒷모습에서 나는 식구들의 온갖 심부름과 궂은일을 도맡아 하느라 휴식 시간에 쉬지 못하고 뛰어다니던 신참 때를 떠올렸다.
“걱정했는데 다들 기대 이상으로 잘 하고 있지?”
“아직까진 괜찮습니다. 하루에 산을 사십 킬로미터씩 타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죠.”
“내일이면 훈련의 딱 중간 지점이네.”
“예, 거길 넘으면 월악산, 마지막으로 대마산에서 훈련이 끝나니 딱 중간이네요.”
임 하사가 암호를 해독한 통신문을 김 중위에게 전했다. 중대장이 수신호로 식구들을 모았다.
“부대장님 긴급 지시 사항이다. 본대와 합류하는 집합 시간이 변경됐다. 두 시간 당겨졌다. 차질 없도록.”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수면, 휴식 시간이 2시간씩 줄어든다는 것과 집합 시간 전에 먼저 도착해 주변을 정찰하는 우리는 발걸음이 더 빨라져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비좁은 비트로 기어 들어갔다. 몸을 옆으로 누이고 칼잠을 잤다.
산 아래 위치한 집합 지점에 도착했다. 뒤이어 본대, 후발대가 도착했다. 하늘은 어두웠고 계속해서 내리는 가랑비와 세찬 바람에 부대원들은 흠뻑 젖어 있었다.
무리한 행군 결과로 대부분이 발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감기, 몸살 환자도 늘어만 갔다. 중대장들이 하루 쉬면서 날씨를 살피고 대원들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부대장에게 건의했다.
“간다면 간다.”
부대장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행군이 강행됐다. 우리 부대는 다시 한 마리의 기다란 구렁이처럼 일열 행군 대열로 늘어서서 가랑비를 맞으며 출발했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았다.
2부 능선을 지날 때만 해도 큰 이상이 없었다. 5부 능선에서 10분간 휴식 후 출발 하자마자 바람이 다시 거세게 불며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내 옆을 걷고 있던 중대장은 ‘어! 기상정보는 약간의 가랑비라 했는데.’ 고개를 갸웃했으나 진눈깨비와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부대장은 대열의 앞뒤를 오가며 독려했다. 추위에 떠는 구렁이 대열을 가다듬기 위해 10분간 휴식했다. 다들 배낭에서 방한 잠바를 꺼내 착용했다. 중대원들은 내가 신형 방한 잠바를 배낭에서 꺼내 입자 다들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다시 행군이 시작됐다. 진눈깨비와 바람은 위로 올라갈수록 심해졌다. 눈이 쌓여 갔다. 군화가 미끄러져 행군 속도가 느려졌다. 선두와 후미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능선이 가파른데다 폭설과 강풍에 시야는 4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중대원들은 감각에 의지해 기다시피 정상으로 향했다. 9부 능선에서 더 이상의 산행은 무리라고 판단한 중대장이 무전기로 7부 능선을 힘겹게 기어오르는 대열의 선두에 선 부대장에게 보고했다.
“비상사태! 기상이변입니다. 더 이상 임무 수행은 불가. 시야 오십 미터 이하. 강풍으로 몸을 가누기 힘듭니다. 당장 하산해야 합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중대장 옆에 있던 나는 통화 내용을 죄다 들을 수 있었다.
“포긴 없다. 신속히 정상을 통과해 집결 지점으로 이동한다. 김 중위, 책임지고 대열을 정상으로 유도해. 여기 시야도 극히 제한 되 있다.”
김 중위는 계속해 설득하려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수분 뒤엔 무전기마저 얼어붙어 통신이 끊어졌다. 몇 년 전부터 보급을 요청했던 AN/PSC-5 주파수 도약 무전기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보급된 수량이 적어 실제 작전 투입 때만 사용됐다. 훈련에는 무겁고 성능이 떨어지는 FM무전기가 지급됐다. 이 무전기의 부품들은 추위에 약했다.
간신히 정상에 기어올랐다. 뒤이어 올라오는 대열을 손전등 불빛과 수신호로 유도하던 중대원들은 눈보라에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방한 잠바가 눈보라에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가볍고 방한 효과가 뛰어난 신형 방한 잠바도 그 놈의 예산 타령 때문에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한 중대에 한 벌씩만 지급됐다. 구형 방한 잠바는 무겁고 부피가 커 장거리 행군 때는 다들 눈치껏 내피를 떼어냈다.
손전등을 흔들며 대열을 유도하던 김 중위가 부관과 함께 서둘러 올라온 부대장에게 뛰어갔다. 부대장은 손사래를 쳤다. 김 중위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낸 부대장이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난 김 중위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고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명령 불복종이야.”
권총 손잡이가 김 중위 턱에 박혔다. 정 상사와 부관이 뛰어들어 부대장을 말렸다.
“넌 전시라면 즉결처분이야. 하산 즉시 군법회의 회부다.”
부대장은 헐떡거리며 올라온 3중대장 고 대위를 불러 뭔가를 지시한 뒤 부관과 산 너머로 사라졌다.
8부 능선부터 좁은 산길이 더욱 좁아져 한 사람씩만 올라 갈 수 있었다. 늘어진 대열은 눈보라 직격탄에 허우적댔다. 대원들은 점점 탈진해져 갔고 체온도 떨어졌다. 첫 사망자는 6중대 이 하사였다. 정상 부근에 쓰러져 있는 그를 같은 중대원들이 발견했다. 서둘러 인공호흡을 했으나 이미 몸은 굳어져 있었다.
후미 대열이 9부 능선에 접근한 것을 본 김 중위는 우리도 빨리 다음 집결지로 하산해야 한다고 고 대위에게 보고했다. 그는 ‘부대장 명령은 정찰 중대는 전 부대원들이 후사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낙오자나 부상자가 있으면 반드시 데리고 하산할 것. 이 명령을 불복한 김 중위는 직위 해제며 지금부터 정찰 중대 지휘권은 나에게 있다.’며 묵살했다.
나와 정 상사는 고 대위 옆에서 더 지체하면 위험하다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휘청거리며 ‘자기 위치를 지켜라. 대열을 유도하라.’는 소리만 반복하던 고 대위가 끝내 쓰러졌다. 심한 전신 경련을 일으켰다. 체온이 31도 이하로 떨어질 때 발생하는 저체온증 증세였다.
시간이 헛되이 흘러가는 것을 막은 것은 김 중위였다. 중대장에게만 지급된 실탄이 든 탄창을 장전했다. K-1 자동소총을 무심한 하늘에 대고 단발로 3발을 발사했다.
“명령이다. 고 대위를 부축해 당장 내려가. 여긴 내가 남겠다. 정 상사가 인솔해. 집결지 도착 즉시 헬기와 구조대를 올려 보내.”
이미 중대원 대부분의 얼굴에 부종과 물집이 생겼다. 정 상사는 떨리는 손으로 수신호를 보내 대원들을 모았다. 김 중위에게 거수경례를 한 뒤 고 대위를 부축해 힘겹게 정상을 내려갔다.
“멋대로 지휘권을 뺐지 마. 지휘관은 나다. 당장 원위치로 돌아가. 명령이다.”
고 대위는 떠밀려 가면서도 고함을 질러댔다.
시야에서 사라진 부대원들의 뒤를 비틀거리며 내려가는 중대원들은 영락없는 패잔병들의 모습이었다. 눈보라는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를 더해 가기만 했다.
“중사, 자네도 하산하게.”
나를 겨눈 총구가 상하로 심하게 떨렸다.
“중위님은 현재 저체온증 환잡니다. 제 말에 따라야 합니다. 당장 내려가야 삽니다.”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침착하게 말했다.
“부상병과 낙오자들을 그냥 두고는......”
“자기 몸도 못 가누는데 누굴 돕겠다는 겁니까? 이런 날씨엔 누구도 어쩔 수 없다고요.”
나는 김 중위의 총을 발로 걷어찼다. 총을 놓친 그가 비틀거렸다. 후사면 급경사를 그를 앞장세워 떠밀면서 내려갔다. 50미터 정도 갔을까. 고 대위가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나는 외면하고 내려갔다.
김 중위가 넘어지면서 굴렀다. 나는 야전 배낭을 벗어 던지고 김 중위의 배낭도 벗겼다. 배낭에서 꺼낸 로프를 잘라 내 허리와 그의 허리에 감았다. 나는 우리들의 휴대 장비를 남김없이 버렸다.
김 중위를 일으켜 세워 내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시야는 30미터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내가 눈보라 속에서 방향을 잡고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내려간 부대원들이 탈진해 하나씩 포기한 총과 배낭, 휴대 장비 덕분이었다. 그것들은 어릴 적 읽었던 동화에서 아이들이 집을 찾아갈 수 있게 해준 하얀 조약돌이나 빵 조각 같이 집결 지점으로 갈 수 있게 해줬다.
그가 넘어지면 나도 넘어지고 내가 쓰러지면 그도 쓰러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눈앞에 초록빛 눈사람이 보였다. 다가가 눈사람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정 상사와 막내 유 하사였다.
정 상사는 유 하사를 두고 갈 수가 없었던 듯 국방색 군용 모포를 함께 둘러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미가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 잠든 것 같았다. 김 중위는 멍한 눈으로 초록 눈사람을 쳐다봤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었다. 저만치 앞에서 한 군인이 방한 잠바와 군복을 벗은 내복 차림에 큰 목소리로 군가를 부르며 절도 있게 행군하고 있었다. 임 하사였다. 그의 얼굴은 짙은 푸른색이었다. 체온이 30도 이하로 내려갈 때 나타난다는 환각 증세인 듯 보였다. 우리가 앞질러 가도 그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행군하며 우렁차게 ‘진짜 사나이’를 불렀다.
“임 하사 목소리 같은데.”
뒤에서 김 중위가 힘없이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잠시 후 뒤돌아보자 진짜 사나이는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바람소리가 채웠다.
‘걸어, 졸면 죽는다.’ 나는 스스로를 재우치며 걸었다.
혹독한 광설에 사방이 뿌옇게 보였다. 허벅지까지 잠겨 오는 눈을 헤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모래주머니를 종아리에 찬 것처럼 발이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뒤돌아 봤다. 김 중위가 쓰러진 채 몸을 비틀며 가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갔다. 눈은 동공이 확장됐고 입은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연신 뻐끔거렸다. 그를 일으켜 세운 나는 다시 계속 기다시피 걸어갔다. 그가 끌려오면서 신음하듯 내뱉었다.
“나를 두고 가, 빨리.”
“아직 까딱없습니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포근한 솜털처럼 느껴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좀 전에 본 초록 눈사람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3시 방향에서 두 줄기의 붉은 끈이 다가왔다. 기다란 끈은 하늘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 사방으로 펴져 나갔다. 야간 작전을 끝내고 철수하는 우리를 안전 코스로 유도하고 추격하는 적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비추던 대형 서치라이트 불빛이었다. 나는 빛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뒤에서 끌려오다시피 따라오던 김 중위가 넘어지면서 나도 그만 넘어졌다. 이윽고 의식이 가물가물 해졌다.
수첩을 덮었다. 시계 바늘은 가쁜 행군을 하고 있었다. 04시에서 04시 30분 사이가 인간이 제일 피곤을 느끼고 신경이 느슨해지는 시간이다. 체포되거나 사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진상을 알려야 했다. 종이상자를 열고 끊어진 로프를 이었다. 환자복을 벗었다. 맨가슴에 수첩과 대검을 댄 채 로프로 단단히 감았다. 침대 옆에 있는 사물함에서 군복을 꺼내 입었다. 군용 담요 다섯 장을 둥글게 말았다. 사물함 문 안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봤다. 수척한 내 얼굴 뒤에 푸른 얼굴의 김 중위와 중대원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 있었다.
창문을 열자 새벽바람이 내 몸을 때렸다. 담요를 던졌다. 심호흡을 하고 화단 잔디밭으로 뛰어내렸다. 회색 병동의 창문은 모두 검정 커텐이 쳐진 채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있었던 3층 병실의 창문만이 활짝 열려진 채 커텐이 바람에 날려 펄럭였다.
몸을 일으킨 나는 건물 뒤편으로 뛰었다. 6미터 높이의 철책이 있었다. 담요 만 것을 편 다음 철책에 걸쳐놓고 그 위로 기어올랐다. 반쯤 기어올랐을 때 주변이 갑자기 환해졌다. 눈이 부셨다. 다급한 외침과 군화 소리가 내 뒤를 엄습했다.
“정지. 움직이면 쏜다.”
너 댓 차례 총성이 울렸다. 공포탄이었다. 후방에 있는 군병원의 경비병에게 실탄이 지급될 리 없었다. 계속 기어올랐다. 철책 정상에 올라타 한쪽 발을 반대편으로 넘겼다.
또 한 차례의 총성이 울렸다. 깊은 통증이 옆구리에 느껴졌다. 나는 곤두박질치며 거꾸로 떨어졌다. 땅에 처박힌 얼굴에 차가운 땅기운이 느껴졌다. 통증이 온 몸을 관통했다.
“......토낄 잡았다. 응답하라. 불량 토끼를 잡았다. 응답하라.”
처얼컥. 머리 위에서 저격 주특기에게 지급되는 수동 장전식 저격 소총의 묵직한 노리쇠 후퇴 장전 소리가 울렸다.<끝>
(200자 원고지 : 82매)
성명 : 노상윤 ( 남자, 36세 )
주소 :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30-2 삼호가든아파트 9동 1006호
연락처 : 회사 (02)562-5978 / 휴대전화 011-722-8313
전자우편 : storch88@hanmail.net
노상윤
“약 드시고 취침하실 시간입니다.”
수면제였다.
“두고 가.”
“드시는 걸 확인해야 됩니다. 군의관 지시 사항 입니다.”
이병 계급장을 단 앳된 얼굴의 위생병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주는 캡슐을 혀 밑에 단단히 밀어 넣곤 투명 플라스틱 컵에 든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지켜본 이병이 불을 끄고 나갔다. 손에 캡슐을 뱉어냈다.
손목시계의 야광 바늘은 자정을 막 넘기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익숙한 소음과 진동이 느껴졌다. 목을 천천히 좌우로 돌렸다. UH-60 헬리콥터 내부였다. 12개의 좌석 대신 그물로 만든 이층 침대가 좌측과 우측에 있었다. 나는 좌측 침대 이층에 뉘어져 벨트로 묶여져 있었다. 우측 이층 침대의 위는 비어 있었고 아래는 군용 담요로 얼굴을 덮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몸에 감각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비명을 질렀다.
“진정해. 이제 다 왔어.”
항공 헬멧을 쓴 승무원이 다가와 내 상체를 눌렀다.
“김 중위는 어떻게 됐소?”
“우린 누가 누군지 몰라. 구조대가 데려오는 데로 실어 나르니까......”
“나와 로프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럼 저기 있는......”
“아냐, 실을 때 봤는데 중사던데. 엘리뇨란 놈 땜에. 그 빌어먹을 산꼭대기는 강풍에다 눈보라에 헬기가 접근할 수 없었어.”
“......”
나는 헬기로 ◯군 병원으로 이송되어졌다. 방송 시청이나 면회, 전화 이 모든 것들이 금지되어 있었다. 4인용 병실을 나 혼자 사용했다. 동상에 걸린 손발이 몹시 가려웠다. 아침이 되자 부대장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괜찮아, 누워 있어. 몸은 어떤가?”
“견딜 만 합니다.”
“내일 부대장으로 영결식을 할 거고 사망자들은 모두 일 계급 특진이야. 그들의 불굴의 군인 정신은 군이 존재하는 날까지 영원 할 걸세. 특히 부하를 두고 갈 수 없어 껴안고 생사를 같이한 삼 중대장 고 대위나 판단 착오로 부대원들에게 무리한 행군을 진행시킨 죄책감에 대원들을 하산시키고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행군을 유도 한 정찰 중대장 김 중위는 진정한 군인 아니, 군신이라 할 수 있지.”
부대장은 군인 정신, 판단 착오, 군신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
“영결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 될 텐데, 수고 해주게.”
“......”
“부관이 하는 말이 우리가 작성한 <조난 보고서>에 대해 자네가 이견이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불만이 있으면 내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보게.”
우리라는 말에 나는 그만 마음이 격해졌다.
“대체, 우리란 누굽니까? 그 보고서의 내용은 군의 의견입니까? 별들의 의견입니까? 부대장님의 의견입니까? 당시 그곳에 있었던 부대원들의 의견입니까? 아니면 관련된 모든 이들의 희망 사항입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사, 일은 벌어졌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해.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특히 자네 자신을 위해서.”
“저를 위해서요?”
“구조대가 자넬 발견했을 때 허리에 로프가 감겨 있었네. 그 곳에서 불과 사십 미터 위쪽에 김 중위가 잘려진 로프를 허리에 감은 채 죽어 있었고.”
음모의 냄새가 맡아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김 중위와 난 산 정상에다 모든 장비를 버렸습니다. 그럼, 그때 던져 버린 탄띠에 달렸던 대검이 발이라도 달렸다는 겁니까?”
“정말 그럴까? 우린 탈진한 상태에서 동료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김 중위 스스로 끈을 끊은 것이라 생각하네. 참다운 희생정신을 보여준 거지. 자넬 살린 김 중위를 위해 이번엔 자네가 우릴 도울 차례야. 부관이 내일 방문하면 작성된 자술서에 자넨 서명만 하면 되네. 앞으로 여기저기서 귀찮게 굴겠지만 염려 마. 자네 뒤엔 우리가 늘 함께 할 거야.”
부대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손짓으로 제지하며 문득 생각난 듯 들고 있던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우리가 주는 선물일세.”
목을 꼿꼿이 세운 부대장이 한마디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상자를 열자 끊어진 두 개의 로프와 대검이 한 자루 들어 있었다. 대검 손잡이에는 김 중위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칼집에서 대검을 뽑았다. 검푸른 빛의 대검은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 침대 밑에서 수첩을 꺼냈다. 적어도 4시간 동안은 방해 받지 않을 것이다. 침대에 앉아 비상등의 붉은 불빛에 의지해 볼펜을 들었다.
정기 종합 전술훈련의 핵심인 천리 행군 시작을 알리는 군악대의 경쾌한 행진곡 연주가 시작됐다. 연병장에 완전군장으로 집합한 부대원들 사이를 오가며 측정관들이 군장 검사를 했다.
이 훈련은 부대별로 성적이 집계되어 보고가 올라가게 되어 있어 부대장이 가장 신경을 쓰는 훈련이었다. 사격, 침투, 폭파, 행군 등등의 훈련들이 줄지어 있었다. 훈련 마지막 일정인 천리 행군은 새벽에 산 속에 비트를 만들고 낮에는 비트에서 자고 밤에는 산을 타는 훈련으로 경험 많은 고참들도 바짝 긴장하는 훈련이었다.
떠도는 소문엔 사령관이 이번 행군을 ‘◯대간첩 사건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극한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을 연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며 행군 지역을 전보다 험한 곳으로 정하고 코스별 훈련도 강도 높게 설정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물먹으면 계급 정년에 걸려 전역해야 하는 부대장도 이번 훈련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소문이 부대 내에 파다했다. 우리 부대와 라이벌 관계인 ◯부대 부대장은 우리 부대장의 육사 후배인데도 정치권과 줄이 닿아 이번에 유력한 진급 케이스라는 것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훈련을 끝낸 ◯부대 성적은 작년보다 크게 앞섰다. ‘남과 똑같이 해서 남보다 앞서리라 기대하지 마라.’부대장이 행군 전 준비 상황을 직접 확인하며 대원들에게 하는 말인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말끝마다 붙이는 경구였다.
“이거 죽을 노릇이네.”
“산 넘어 산이군. 위에서 포위망을 너무 일찍 풀게 해 토끼들이 도망간 것을 우리 실력이 부족해서 못 잡은 것으로 몰고 가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강 하사 그 녀석. 요즘도 가끔 꿈에 나타나.”
한숨쉬며 말하는 임 하사의 말을 들으니 체대 다니다 하사로 자원한 큰 키에 새우 눈을 늘 깜박거리던 강 하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수함으로 침투한 적들을 소탕하기 위한 ‘◯대간첩 작전’ 끝물 이였다. 육군본부에서는 일명 ‘토끼몰이 작전’을 폈다. 적이 있을 법한 산 주변에 육군과 전투경찰을 동원해 원형 포위망을 만들었다. 몰이꾼이 사냥감을 산 위로 몰며 올라오면 우리 중대는 헬기로 산 정상에 하강해 매복하거나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며 적을 소탕했다.
작전 16일 째, UH-60 수송 헬기에 탄 우리 중대는 3중대가 탑승한 헬기와 함께 좌표: TD-2875R 지역을 선회하며 몰이꾼들이 올라오는 것을 지켜봤다. 무전으로 통신을 주고받던 김 중위가 소리쳤다.
“본부, 토끼 두 마리 발견. 육 부 능선에서 정상으로 뛰고 있다.”
“정상에 정찰 중대 애들을 레펠링 시켜. 삼 중대는 엄호하며 대기 해.”
다른 주파수로 들어 온 듯 심한 잡음과 함께 들리는 목소리는 부대장 그였다. 이 상황에서 레펠링 하는 것은 궁지에 몰린 배고픈 개구리가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바로 위로 파리가 한 마리씩 줄을 타고 내려가는 것과 같았다.
“부대장님, 산 후사면에 백호 사단 수색 소대가 매복 중입니다. 토끼가 내려갈 때 수색 소대 애들이 잡으면 됩니다.”
“그건 내 꺼야. 우리 토끼를 딴 놈한테 내 줄 수 없다. 정상에서 잡아라. 통신 끝.”
“......알겠습니다.”
김 중위는 조종사에게 손짓으로 하강 신호를 보냈다.
“내가 먼저 간다.”
김 중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중위님 제가 이미 하강기에 로프를 연결했으니 다음 차례로 오십시오.”
출입문 하강기 옆에서 경계를 보고 있던 강 하사가 로프와 스냅링을 연결해 빠르게 내려갔다. 나는 하강기 옆에서 K-1 자동소총으로 엄호 사격 자세를 취했다. 헬기 뒤쪽에서 양철 지붕 위로 우박 쏟아질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강 하사의 몸이 꿈틀했다. 로프가 끊어졌다.
“사격 받고 있다. 다섯 시 방향.”
헬기가 급선회했다. 조종사가 비명을 질렀다. 하강을 위해 안전띠를 풀었던 나는 헬기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지막 기억은 3중대가 탄 헬기가 출입문에 장착된 기관총을 난사하며 선회하는 모습이었다. 5발마다 한발씩 들어 있는 예광탄의 붉은 궤적이 끝없이 이어졌다. 산 정상에 붉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후송된 나는 열흘간 ◯◯군병원에서 뇌진탕과 금이 간 왼쪽 어깨의 치료를 받은 후 중대로 돌아왔다. 3중대장 고 중위는 표적을 찾지 못했던 헬기 기총 사수를 밀쳐 내고 출입문에 장착된 기관총을 직접 사격해 산산조각 난 토끼 한 마리를 잡은 공로로 일 계급 특진에 포상 휴가 중이었다. 김 중위에게 복귀 신고했다.
“수고 많았어. 체력 훈련 확실히 해서 곧 있을 전술 훈련 받는데 차질 없도록 해.”
그의 표정은 몹시 침울했다. 나는 내무반에 돌아가 중대원들을 만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재주는 뭐가 부리고 챙기는 건 뭐가 챙긴다더니. 김 중위가 총대 맸어.”
“뭔 소리야?”
나는 PX에서 산 음료수 캔을 중대원들에게 돌리며 물었다.
“김 중위가 하강 명령을 내린 걸로 처리됐어. 포상은 부대장과 3중대장이 받고. 나 같으면 육본 조사위원회에서 나왔을 때 한번 뒤집어 놓았을 텐데.”
끊었던 담배를 다시 시작한 듯 뻐끔거리며 서 중사가 말했다.
“그때 내려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데 토 달 놈은 없을 거야. 김 중위가 먼저 내려갔어야 하는 거 아냐. 우리 모두 그렇게 배웠잖아요?”
박 하사였다.
“쓸데없는 소리, 그때 모두 봤잖아? 강 하사가 자원한 거지. 김 중위가 등 떠민 건 아니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내 서슬에 따지는 투로 말하던 박 하사가 움찔했다.
“근데 김 중위 그 성격으로는......”
“그러게, 중대장들 중 혼자 알티 출신이니 걸레 빠는 일은 다 넘어올 것 같아. 김 중위 그 사람 ‘까라면 예 하고 까는 식’이니.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판단해 싸울 땐 싸우고 막을 건 막아 주고 해야 되는데...... 저런 타입은 부관이나 참모가 제격이지, 현장 지휘관 타입은 아냐.”
강 하사의 사수였던 이 하사가 다 마신 콜라 캔을 휴지통에 던지며 투덜댔다.
“소가 뒷걸음치다 생쥐 잡은 격이지. 손바닥 만 한 야산 꼭대기에다 엠 육공으로 사백 발이 넘게 난사해 쑥대밭을 만들었는데 뭔들 못 잡겠어.”
“토끼들도 대단해. 구형 엠 씩스틴으로 레펠링 하던 애한테 세 발을 쏴서 몽땅 머리에 맞추다니. 그 중 한발은 로프도 끊었잖아. 하강시간이 삼~사초 정도니 조준하는데 일초 여유밖에 없었을 텐데.”
침울한 표정인 정 상사의 말을 끝으로 입을 여는 중대원은 없었다.
그 날 저녁 나와 김 중위는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부대 근처에 있는 국밥집에서였다. 구석 자리에 앉아 한동안 말없이 소주만 들이켰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번 작전에 대해 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포위망이 계속 뚫렸고 결국 토끼 두 마리는 놓쳤지. 인명 피해도 크고. 대원들 사이에 이런 저런 얘기가 많겠지. 나도 알아.”
“저희야 중위님을 믿죠.”
손짓으로 소주를 한 병 더 시키며 남은 술을 그의 잔에 가득 부었다.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내가 먼저 내려갔어야 했어.”
‘전시에 낙하는 가장 계급이 높은 자가 가장 먼저 뛰어내리는 것이 불문율이다.’ 첫 공수 교육 때 암팡진 체구의 낙하 교관이 말했다.
“지나간 일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특히 사고 뒤에는.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저번 산악 구보 훈련 때 중사가 같이 뛰어 준 전우의 끈 기억나지? 강 하사가 하강하는 것을 보며 그 생각이 났어. 총 맞고 떨어지는 것보다 내가 더 놀란 것은 로프가 끊어진 거야. 강 하사 다음이 나였잖아. 그와 내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다음엔 내가 먼저야. 자네도 분명히 알아두라고.”
“......사실 지금에서야 말씀드리지만 그땐 부대기가 딴 중대로 넘어갈 것 같아 대원들 모두 조마조마 했죠.”
김 중위와 친해지게 된 데는 산악 구보에 약했던 그를 개인 지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나와 동갑이기도 했다.
여름 햇살이 따갑게 얼굴을 찌르는 일요일 오후였다.
“똑바로 하십쇼. 이래 갔고 측정 통과는 어림도 없습니다.”
부대 입구에서 산악 훈련장까지 전력 질주로 땀범벅이 된 김 중위에게 나는 쏘아붙였다. 부대원들 중 선발된 우리 정찰 중대가 이번 산악 구보 측정에서 타 중대에게 뒤진다면 ‘최우수 중대’라는 붉은 부대기를 한번도 다른 중대에 양보하지 않은 우리 중대로선 수치였다.
80년도 초 까지만 해도 계급에 상관없이 처음 들어오면 부대원들이 막내 하사와 태권도 대련을 붙여 승패나 승부 근성에 따라 대접을 해주던 부대의 전통은 이제는 엄격히 금지됐으나 우리 중대에선 강도가 약해졌을 뿐 그 전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중대원들의 평가 결과 진급해서 사령부로 영전한 최 대위 후임으로 부임한 신임 중대장 김 중위는 산악 구보 실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지적됐다. 그런 그를 중대 최고참 하사관인 정 상사가 지도 하게 정해져 있었으나 그가 두 달간 해군 UDT에서 수중 폭파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나는 바람에 내가 맡게 됐다. 김 중위가 ROTC 출신임에도 대부분 육사 출신들로 채워져 있는 우리 부대에 자원해서 왔다는 것을 동기 중사 모임의 술자리에서 인사계에게 들었다.
“그 친구 부대장 면담 때 시간 때우고 제대하면 되는 반쪽 장교가 여기 뭐 하러 왔냐니까. 말씀하신 데로 어차피 국방부 시계는 가는데 추억 거리를 남기기 위해서 물 좋은 보급계 걷어차고 이리로 자원했습니다, 하더군.”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같이 땀 흘리며 부대끼다 보면 상대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법이다.
“제한 시간 한 시간. 모든 중대가 이곳 훈련장 입구에서 감독관에게 군장 검사를 받고 동시에 출발합니다. 지정된 산길 십 킬로미터를 가장 빠르게 들어오는 중대가 우승입니다. 중대원 중 가장 늦게 들어오는 녀석의 시간이 중대 전체 기록이 됩니다. 문제는 중위님 기록이 열 두 명 중 꼴찌에다 제한 시간대인 오십 팔 분대라는 것입니다. 제 말 중에 틀린 점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정확한 분석이군. 그래서 휴일에도 개인 훈련을 하잖아. 같은 중대원인 자네가 함께 해준다니 고맙네. 중사.”
김 중위는 손바닥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야전 배낭을 열고 5미터 길이로 자른 로프를 꺼냈다. 허리에 스냅링을 연결했다.
“이건 ‘전우의 끈’이라 부릅니다.”
“전우의 끈?”
“신참이 구보 훈련 때 고참과 줄을 연결해서 같이 뛰는 것인데 저도 5년 전에 이렇게 훈련해 첫 측정을 무사히 끝냈습니다.”
그는 내가 내미는 로프에 연결된 스냅링을 자신의 탄띠에 연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출발하게, 중사 .”
그렇게 산악 구보 훈련을 거듭한 뒤 본 측정에서 우리 중대는 부대기를 지켰다. 김 중위는 때마침 중대마다 한 벌씩만 지급돼 통상 중대장이 가지게 되는 신형 방한 잠바를 내게 양보했다.
적 후방에 침투해 중대 단위로 행동을 하는 우리 부대는 개인의 주특기와 동료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유지됐다. 각 중대는 장교1명에 하사관 11명으로 편성됐다. 하사관은 전문 분야인 주특기와 부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부특기는 주특기를 가진 대원이 임무 수행이 불가능해질 경우 그 일을 대신하기 위해 필요했다.
내 주특기는 의무였다. 불빛 하나 없는 첩첩산중에서 손전등과 면도칼 하나로 응급 외과 수술을 할 수 있다. 부특기는 통신으로 만일 통신 담당 임 하사가 쓰러지면 내가 그 일을 맡고 내가 운이 다하면 폭파 주특기를 가지고 있는 서 중사가 의무를 대신 할 수 있게 훈련 받았다.
작은 키에 항상 검정 선글라스를 쓰는 부대장의 입버릇처럼 ‘적지에서 지휘차 몰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똑같이 훈련 받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계급보다 각자 주특기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중시됐다. 장교들은 처한 상황에 따라 해당 주특기 하사관의 의견을 반영해 작전을 지휘했다.
술병은 쌓여 갔고 술국은 식었다. 술은 이래서 좋다. 서로의 이해관계나 생각을 스스럼없이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 술자리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말했다.
“또 그런 일 있으면 제가 먼저고 끈도 끝까지 이어 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약속합니다.”
“정말인가?”
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하하, 그럼요. 그만 일어나시죠.”
군장 검사가 끝나자 선임 측정관이 서류철에 시간을 기록하고 행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이번엔 저번하고 많이 달라. 이 악물어야 할 거야. 자, 출발.”
김 중위의 말을 끝으로 행군이 시작됐다. 부대 정문을 지나 출발하는 부대원들에게 군악대가 군가 ‘진짜 사나이’로 환송해 주었다.
우리 중대는 정찰 중대라는 명칭에 걸맞게 선두에 섰다. 본대와 통신을 유지하며 산을 타고 넘었다. 3월 중순의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산속은 아직 겨울이었다.
나는 휴식 시간에 중대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행군 일정을 빡빡하게 잡은 데다 본대보다 앞서가야 했기에 대원들의 피로가 빨리 왔다. 대부분이 가벼운 몸살 증세를 보였다. 나는 대원들에게 6시간마다 해열제 2정씩을 복용케 했다.
목적지인 산의 7부 능선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6인용 비트를 50미터 간격으로 2개를 만들기로 한 중대장 결정에 따라 대원들은 비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김 중위와 나는 작업하는 대원들을 한 명씩 불렀다. 훈련이 심해지면 흔히 신참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에도 강 하사 후임으로 온 유 하사가 골칫거리였다.
“유 하사, 젖은 양말 갈아 신지 않았지?”
나는 유 하사에게 바싹 당겨 앉으며 군화를 벗어 보라고 했다. 유 하사의 양 발바닥에는 한 군데 씩 자두 크기의 물집이 잡혀 있었다.
“양말 여분 있나?”
유 하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김 중위가 배낭에서 양말 한 묶음을 꺼내 건네주며 자주 갈아 신으라고 했다. 나는 물집과 상처를 소독해 줬다. 비트 작업을 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가는 유 하사의 뒷모습에서 나는 식구들의 온갖 심부름과 궂은일을 도맡아 하느라 휴식 시간에 쉬지 못하고 뛰어다니던 신참 때를 떠올렸다.
“걱정했는데 다들 기대 이상으로 잘 하고 있지?”
“아직까진 괜찮습니다. 하루에 산을 사십 킬로미터씩 타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죠.”
“내일이면 훈련의 딱 중간 지점이네.”
“예, 거길 넘으면 월악산, 마지막으로 대마산에서 훈련이 끝나니 딱 중간이네요.”
임 하사가 암호를 해독한 통신문을 김 중위에게 전했다. 중대장이 수신호로 식구들을 모았다.
“부대장님 긴급 지시 사항이다. 본대와 합류하는 집합 시간이 변경됐다. 두 시간 당겨졌다. 차질 없도록.”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수면, 휴식 시간이 2시간씩 줄어든다는 것과 집합 시간 전에 먼저 도착해 주변을 정찰하는 우리는 발걸음이 더 빨라져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비좁은 비트로 기어 들어갔다. 몸을 옆으로 누이고 칼잠을 잤다.
산 아래 위치한 집합 지점에 도착했다. 뒤이어 본대, 후발대가 도착했다. 하늘은 어두웠고 계속해서 내리는 가랑비와 세찬 바람에 부대원들은 흠뻑 젖어 있었다.
무리한 행군 결과로 대부분이 발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감기, 몸살 환자도 늘어만 갔다. 중대장들이 하루 쉬면서 날씨를 살피고 대원들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부대장에게 건의했다.
“간다면 간다.”
부대장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행군이 강행됐다. 우리 부대는 다시 한 마리의 기다란 구렁이처럼 일열 행군 대열로 늘어서서 가랑비를 맞으며 출발했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았다.
2부 능선을 지날 때만 해도 큰 이상이 없었다. 5부 능선에서 10분간 휴식 후 출발 하자마자 바람이 다시 거세게 불며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내 옆을 걷고 있던 중대장은 ‘어! 기상정보는 약간의 가랑비라 했는데.’ 고개를 갸웃했으나 진눈깨비와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부대장은 대열의 앞뒤를 오가며 독려했다. 추위에 떠는 구렁이 대열을 가다듬기 위해 10분간 휴식했다. 다들 배낭에서 방한 잠바를 꺼내 착용했다. 중대원들은 내가 신형 방한 잠바를 배낭에서 꺼내 입자 다들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다시 행군이 시작됐다. 진눈깨비와 바람은 위로 올라갈수록 심해졌다. 눈이 쌓여 갔다. 군화가 미끄러져 행군 속도가 느려졌다. 선두와 후미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능선이 가파른데다 폭설과 강풍에 시야는 4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중대원들은 감각에 의지해 기다시피 정상으로 향했다. 9부 능선에서 더 이상의 산행은 무리라고 판단한 중대장이 무전기로 7부 능선을 힘겹게 기어오르는 대열의 선두에 선 부대장에게 보고했다.
“비상사태! 기상이변입니다. 더 이상 임무 수행은 불가. 시야 오십 미터 이하. 강풍으로 몸을 가누기 힘듭니다. 당장 하산해야 합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중대장 옆에 있던 나는 통화 내용을 죄다 들을 수 있었다.
“포긴 없다. 신속히 정상을 통과해 집결 지점으로 이동한다. 김 중위, 책임지고 대열을 정상으로 유도해. 여기 시야도 극히 제한 되 있다.”
김 중위는 계속해 설득하려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수분 뒤엔 무전기마저 얼어붙어 통신이 끊어졌다. 몇 년 전부터 보급을 요청했던 AN/PSC-5 주파수 도약 무전기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보급된 수량이 적어 실제 작전 투입 때만 사용됐다. 훈련에는 무겁고 성능이 떨어지는 FM무전기가 지급됐다. 이 무전기의 부품들은 추위에 약했다.
간신히 정상에 기어올랐다. 뒤이어 올라오는 대열을 손전등 불빛과 수신호로 유도하던 중대원들은 눈보라에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방한 잠바가 눈보라에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가볍고 방한 효과가 뛰어난 신형 방한 잠바도 그 놈의 예산 타령 때문에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한 중대에 한 벌씩만 지급됐다. 구형 방한 잠바는 무겁고 부피가 커 장거리 행군 때는 다들 눈치껏 내피를 떼어냈다.
손전등을 흔들며 대열을 유도하던 김 중위가 부관과 함께 서둘러 올라온 부대장에게 뛰어갔다. 부대장은 손사래를 쳤다. 김 중위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낸 부대장이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난 김 중위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고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명령 불복종이야.”
권총 손잡이가 김 중위 턱에 박혔다. 정 상사와 부관이 뛰어들어 부대장을 말렸다.
“넌 전시라면 즉결처분이야. 하산 즉시 군법회의 회부다.”
부대장은 헐떡거리며 올라온 3중대장 고 대위를 불러 뭔가를 지시한 뒤 부관과 산 너머로 사라졌다.
8부 능선부터 좁은 산길이 더욱 좁아져 한 사람씩만 올라 갈 수 있었다. 늘어진 대열은 눈보라 직격탄에 허우적댔다. 대원들은 점점 탈진해져 갔고 체온도 떨어졌다. 첫 사망자는 6중대 이 하사였다. 정상 부근에 쓰러져 있는 그를 같은 중대원들이 발견했다. 서둘러 인공호흡을 했으나 이미 몸은 굳어져 있었다.
후미 대열이 9부 능선에 접근한 것을 본 김 중위는 우리도 빨리 다음 집결지로 하산해야 한다고 고 대위에게 보고했다. 그는 ‘부대장 명령은 정찰 중대는 전 부대원들이 후사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낙오자나 부상자가 있으면 반드시 데리고 하산할 것. 이 명령을 불복한 김 중위는 직위 해제며 지금부터 정찰 중대 지휘권은 나에게 있다.’며 묵살했다.
나와 정 상사는 고 대위 옆에서 더 지체하면 위험하다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휘청거리며 ‘자기 위치를 지켜라. 대열을 유도하라.’는 소리만 반복하던 고 대위가 끝내 쓰러졌다. 심한 전신 경련을 일으켰다. 체온이 31도 이하로 떨어질 때 발생하는 저체온증 증세였다.
시간이 헛되이 흘러가는 것을 막은 것은 김 중위였다. 중대장에게만 지급된 실탄이 든 탄창을 장전했다. K-1 자동소총을 무심한 하늘에 대고 단발로 3발을 발사했다.
“명령이다. 고 대위를 부축해 당장 내려가. 여긴 내가 남겠다. 정 상사가 인솔해. 집결지 도착 즉시 헬기와 구조대를 올려 보내.”
이미 중대원 대부분의 얼굴에 부종과 물집이 생겼다. 정 상사는 떨리는 손으로 수신호를 보내 대원들을 모았다. 김 중위에게 거수경례를 한 뒤 고 대위를 부축해 힘겹게 정상을 내려갔다.
“멋대로 지휘권을 뺐지 마. 지휘관은 나다. 당장 원위치로 돌아가. 명령이다.”
고 대위는 떠밀려 가면서도 고함을 질러댔다.
시야에서 사라진 부대원들의 뒤를 비틀거리며 내려가는 중대원들은 영락없는 패잔병들의 모습이었다. 눈보라는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를 더해 가기만 했다.
“중사, 자네도 하산하게.”
나를 겨눈 총구가 상하로 심하게 떨렸다.
“중위님은 현재 저체온증 환잡니다. 제 말에 따라야 합니다. 당장 내려가야 삽니다.”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침착하게 말했다.
“부상병과 낙오자들을 그냥 두고는......”
“자기 몸도 못 가누는데 누굴 돕겠다는 겁니까? 이런 날씨엔 누구도 어쩔 수 없다고요.”
나는 김 중위의 총을 발로 걷어찼다. 총을 놓친 그가 비틀거렸다. 후사면 급경사를 그를 앞장세워 떠밀면서 내려갔다. 50미터 정도 갔을까. 고 대위가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나는 외면하고 내려갔다.
김 중위가 넘어지면서 굴렀다. 나는 야전 배낭을 벗어 던지고 김 중위의 배낭도 벗겼다. 배낭에서 꺼낸 로프를 잘라 내 허리와 그의 허리에 감았다. 나는 우리들의 휴대 장비를 남김없이 버렸다.
김 중위를 일으켜 세워 내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시야는 30미터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내가 눈보라 속에서 방향을 잡고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내려간 부대원들이 탈진해 하나씩 포기한 총과 배낭, 휴대 장비 덕분이었다. 그것들은 어릴 적 읽었던 동화에서 아이들이 집을 찾아갈 수 있게 해준 하얀 조약돌이나 빵 조각 같이 집결 지점으로 갈 수 있게 해줬다.
그가 넘어지면 나도 넘어지고 내가 쓰러지면 그도 쓰러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눈앞에 초록빛 눈사람이 보였다. 다가가 눈사람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정 상사와 막내 유 하사였다.
정 상사는 유 하사를 두고 갈 수가 없었던 듯 국방색 군용 모포를 함께 둘러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미가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 잠든 것 같았다. 김 중위는 멍한 눈으로 초록 눈사람을 쳐다봤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었다. 저만치 앞에서 한 군인이 방한 잠바와 군복을 벗은 내복 차림에 큰 목소리로 군가를 부르며 절도 있게 행군하고 있었다. 임 하사였다. 그의 얼굴은 짙은 푸른색이었다. 체온이 30도 이하로 내려갈 때 나타난다는 환각 증세인 듯 보였다. 우리가 앞질러 가도 그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행군하며 우렁차게 ‘진짜 사나이’를 불렀다.
“임 하사 목소리 같은데.”
뒤에서 김 중위가 힘없이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잠시 후 뒤돌아보자 진짜 사나이는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바람소리가 채웠다.
‘걸어, 졸면 죽는다.’ 나는 스스로를 재우치며 걸었다.
혹독한 광설에 사방이 뿌옇게 보였다. 허벅지까지 잠겨 오는 눈을 헤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모래주머니를 종아리에 찬 것처럼 발이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뒤돌아 봤다. 김 중위가 쓰러진 채 몸을 비틀며 가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갔다. 눈은 동공이 확장됐고 입은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연신 뻐끔거렸다. 그를 일으켜 세운 나는 다시 계속 기다시피 걸어갔다. 그가 끌려오면서 신음하듯 내뱉었다.
“나를 두고 가, 빨리.”
“아직 까딱없습니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포근한 솜털처럼 느껴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좀 전에 본 초록 눈사람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3시 방향에서 두 줄기의 붉은 끈이 다가왔다. 기다란 끈은 하늘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 사방으로 펴져 나갔다. 야간 작전을 끝내고 철수하는 우리를 안전 코스로 유도하고 추격하는 적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비추던 대형 서치라이트 불빛이었다. 나는 빛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뒤에서 끌려오다시피 따라오던 김 중위가 넘어지면서 나도 그만 넘어졌다. 이윽고 의식이 가물가물 해졌다.
수첩을 덮었다. 시계 바늘은 가쁜 행군을 하고 있었다. 04시에서 04시 30분 사이가 인간이 제일 피곤을 느끼고 신경이 느슨해지는 시간이다. 체포되거나 사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진상을 알려야 했다. 종이상자를 열고 끊어진 로프를 이었다. 환자복을 벗었다. 맨가슴에 수첩과 대검을 댄 채 로프로 단단히 감았다. 침대 옆에 있는 사물함에서 군복을 꺼내 입었다. 군용 담요 다섯 장을 둥글게 말았다. 사물함 문 안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봤다. 수척한 내 얼굴 뒤에 푸른 얼굴의 김 중위와 중대원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 있었다.
창문을 열자 새벽바람이 내 몸을 때렸다. 담요를 던졌다. 심호흡을 하고 화단 잔디밭으로 뛰어내렸다. 회색 병동의 창문은 모두 검정 커텐이 쳐진 채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있었던 3층 병실의 창문만이 활짝 열려진 채 커텐이 바람에 날려 펄럭였다.
몸을 일으킨 나는 건물 뒤편으로 뛰었다. 6미터 높이의 철책이 있었다. 담요 만 것을 편 다음 철책에 걸쳐놓고 그 위로 기어올랐다. 반쯤 기어올랐을 때 주변이 갑자기 환해졌다. 눈이 부셨다. 다급한 외침과 군화 소리가 내 뒤를 엄습했다.
“정지. 움직이면 쏜다.”
너 댓 차례 총성이 울렸다. 공포탄이었다. 후방에 있는 군병원의 경비병에게 실탄이 지급될 리 없었다. 계속 기어올랐다. 철책 정상에 올라타 한쪽 발을 반대편으로 넘겼다.
또 한 차례의 총성이 울렸다. 깊은 통증이 옆구리에 느껴졌다. 나는 곤두박질치며 거꾸로 떨어졌다. 땅에 처박힌 얼굴에 차가운 땅기운이 느껴졌다. 통증이 온 몸을 관통했다.
“......토낄 잡았다. 응답하라. 불량 토끼를 잡았다. 응답하라.”
처얼컥. 머리 위에서 저격 주특기에게 지급되는 수동 장전식 저격 소총의 묵직한 노리쇠 후퇴 장전 소리가 울렸다.<끝>
(200자 원고지 : 82매)
성명 : 노상윤 ( 남자, 36세 )
주소 :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30-2 삼호가든아파트 9동 1006호
연락처 : 회사 (02)562-5978 / 휴대전화 011-722-8313
전자우편 : storch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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