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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형-시(200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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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09회 작성일 04-11-15 21:58

본문

< 樂山樂水 >

우리는 장난치듯 봄 햇살의 비유를
작은 종이 위에다 새겨 놓았다
하늘은 벤치에 내리는 맑은 마음을
지하철에도 날리고, 버스 창에도 날렸다
하루 종일 우리의 웃음을 소재 삼아
남은 희망을 떨어지는 꽃잎에
다시 날려 보냈다
도망치듯 날아가는 종이를 잡으러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니다
종로며 대학로며 충무로는
우리의 걸음걸이 보다 더 길어
의식의 축지법이 필요했다
쉽게 남은 길을 포기하기도 했고,
더 먼 길을 꿈꾸기도 했지만
술 취한 밤이 길어
꿈의 집은 거북이 등처럼 단단하고 느렸다
우리는 꿈을 얘기하다가
단단하고 느린 거북이가 되어
온 산과 바다를 깔깔거리며
떠돌아 다녔다























< 맑은 날 >

날이 개었다.
하늘엔 가슴 같은 도장 몇 개가
마른 의식들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 속을 걷고 있었다
하늘 아래 삶의 길들은
젖은 나뭇잎처럼 위태롭기도 한 법이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이 마른 길을 걸으며 언뜻 웃는다
가끔씩은 헐레벌떡 숨이 가쁘고
이 길의 먼지에 체해
마음의 반이 시커멓게 엉켜
맑은 하늘 위에 걸리면
단단한 또 다른 반의 마음이여
눈물처럼 젖어라
단단한 반의 마음이여,
이제는 하늘이다

























< 사과 향기 주변 >

과수원에 어둠이 와도
나무와 부딪히는 일은 없다
나무만한 향기가 그 만큼의 흔적을 남기며
빨간 등대처럼 서 있다
과수원 구름이 노을 속에 가벼운 날에도
사과 속살 푹 익힌 침묵이나
나뭇가지 숨이 찬 가슴 하나 두 손 모아 들면
어느새 기억들은 둥근 눈물에 갇혀 씨앗들을 맺는다
먼 길가 사람들의 한숨 소리에도
사과나무 어귀쯤에서는 달콤한 침샘을 삼키리라
손이 바쁘다
과수원 식구들은 사과를 딴다
표면 어디에도 흠집이라곤 발견할 수 없고
혹 미세한 상처가 커질 준비를 하고 있어도
점점 벌어지는 틈 사이로 발자국 소리 들려와
고운 흙 알맞게 햇볕 드는 곳에서
푸른 씨앗 밟아준다
촉촉한 그리움이 입안 가득 고이는 일
그리움으로 사과를 닦는다
비록 작은 꼭지나 밑동이
씀씀이가 작을지라도
바라 뵈는 향기 소롯한 빛깔이
그 만큼의 몫인 것처럼
눈물 냄새 따르는
눈부신 바람들이
사과 딴 자리엔 남아 있다


















< 빗방울 얹혔다 떨어진 나뭇잎 >

간밤 늦은 비 그친 곳 창 열어
신선한 꿈 한 모금 들이키고 있을 때
천일기도 끝자락에 피어난
홍자색 자목련 꽃향 같기도 하고
합장한 손 마디마디에 타오르는
향내 같기 도한 푸른 입자 가득
내 가슴에 한바가지 쏟아진다
어디서 나는 향길까
눈빛은 무거운 가지를 붙들고서
간밤의 빗물을 보내고 있다
마당 가득 빗방울과 함께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엄마품 흙으로가 안긴다
똑 똑 빗방울 떨궈내는 나뭇잎들이,
가지 끝 속죄를 쥐고있는 나뭇잎 몇이
흔들리며 기도를 한다
향기는 저 곳에서 퍼져 나온 것일까
무거운 염주알을 돌리듯 흔들리며 흔들리며
장마가 가을로 환생하는 향길까
잎자루 가득 빗방울 얹혔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이천拜 삼천拜 푹 익은 인내의 향기를 퍼뜨리고 있을 때,
깊은숨을 들이키자 향기는 몸 안 가득 웃는다



















< 달맞이꽃 >

1.

언덕 위에서 더위는 주섬주섬 풍경을 모으고 있다 동네
산비탈 앞자락에 한 두개 불빛이 바람을 기다리며 서 있다.
찌푸린 미간에서 털어 낸 먼지들, 바람에 실려 둔덕을 지나
풍경에 놓인다 단념하듯 어스름가면 저마다 밥짓는 불빛이
켜진다 활짝 핀 저녁꽃 같이 밥 냄새 꽃술 가득 퍼지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 연탄가스에 취한 맨 위 세 번째 불빛은 아직
꽃술을 머금지 않는다) 나는 저녁꽃, 맑은 달 아래 낮은 동네
몇몇 시큰둥이들 풍경에서 밀어내고는 그 틈틈으로 희디흰
맨살 내는 꿈을 꾼다 하지만 갑작스레 비라도 뿌리는 날엔

아마도  
그대 눈을 보기 전
지쳐 버릴지도 모른다

2.

안개 나지막한 새벽 어둠에 잠겨 또다시 시작하는 달마중
일정한 행복의 마음이란 꿈을 여는 열쇠꾸러미 어느 곰삭은
열정 길섶에다 옮겨둘 때도 밤만 되면 떠오를 님이 보고파
오밀조밀 저녁꽃 필 무렵 설레는 속내에는 묵직한 돌 하나
자란다 그래도 간절한 기도, 부족한 이 마음 무엇으로 채우
나 어느 틈엔가 얄궂은 빗물처럼 눈앞에 그리운 그대

오늘도 흐린 날이다.

















< 물 속의 빈손 >

가질 것이 너무 많은 사회에서
내 손이 너무 작음을 한탄한다.
하지만 손 씻은 물이 내 손의 더러움을
비누 거품 물위에 둥둥 띄워 놓는다.
장마 속에 축축한 이불들을 짬짬이 널어 말리고
날갯죽지 젖은 비둘기에게
내 심연의 누룽지처럼 말라붙은 욕망을 던져 주고서
또 손을 씻는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뉴스에 나올 때마다
쥐고 놓지 않은 것들이 짐이 될 수 있다고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 아들의 손에는
아무 것도 쥐어지지 않는다
세상에 아버지께서 남기신 유일한 유산인 내 빈손이
장마의 눅눅함에 씻겨 하수구로 쓸려간다
하수구 물 속에서 빈 손이 더러운 오물을 걸어다닌다
세숫대야의 물이 장마동안은 지겨워도,
유일하게 손을 씻는 그 동안에는 안다.
물 속에서 나의 손은 언제나 빈손이라는 것을,
쥘 수 있을 만큼 꼭 손을 쥐어도
빈손의 주먹을 쥐고 쉬고 있음을.
더러운 손안을 깊이 들여다보며  
이제, 대야 안의 더러운 물을 버린다



















< 시를 파는 가게 >

선배형의 실직이 은행빚 재촉하는 겨울
우리 손과 발처럼 시렵다
그 겨울에 엘니뇨현상이 싼 우동냄비처럼 이 땅을 데웠지만
먹고사는 일들보다 더 급한 일들은 흰눈을 좋아하지 않는다
추위는 과연 과일들을 먹게 만들까
형은 과일가게를 냈다
복덕방 구석을 빌려 누추한 그만의 일터를 마련하고서
과일들이 얼지 않을까 밤새 걱정하였다
나는 가끔 그 가게를 지켰지만
과일들은 하루종일 내게 없는 것들만 떠올리게 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는 돈들은 얼마나 피곤할까
그럼 형의 저 낡은 지갑 속에 편히 쉬렴
형수님의 착한 이마에 앉은 먼지들아 이제 좀 내려와 흙을 안아보렴
나는 그 가게에 앉아 있을 때면 내게 없는 것들에게 시를 쓰고 있었다
그러면 과일 가게는 이네 시를 파는 근사한 가게가 되어 있었다
못 이룬 꿈은 과일과 함께 들어간 비닐봉지 안에서 꿈틀거리다
손쉬운 지름길을 저 멀리 돌아가고 있었다.
























< 출근 >

만원 지하철에서 발붙일 한 뼘의 땅을 내려다본다
원한다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적을지라도
그보다 더 큰공간을 보고 싶었다
도망가는 땅을 발 밑에다 끌어다 두고
고단한 출근은 사람들 사이에서 퇴근한다
반가운 얼굴들은 없지만 지하철 안의 얼굴들은
회사의 서류철에 철해지고, 조는 얼굴이 잠깐 잠깐
실직을 걱정하듯 깜짝 놀라 시계를 본다
이 땅엔 풍화작용으로 깎여진 모래보다 많은 얼굴들이 있다
얼굴들이 각자의 목적지로 출근하는 아침마다
발 밑으로 끌어온 땅을 내려다본다
얼굴들의 발이 제각기 공간을 마련하고 서 있다
서로의 발이 포개지기도 하고,
좁은 빈 공간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신의 길을 찾고 있다
이리저리 떠밀리는 출근이라도
다행인 이 길을 따라
전철 불빛 깜박거리면 이제 갈 곳이 없다
커다란 손전등 하나 들고
실직한 몇 주 동안 옛 직장으로 가는 길에서
사람들의 얼굴이나 발을 살피고 있다
그들을 보며 그들의 마음에까지 흘러가는 긴 레일을 놓아
새로운 출근길을 만들고 있다.




















< 백화점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도 살 수 있을까 >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 백화점에 간다
진열품들을 보며 내 것인 양
의기양양해야 한다
1층, 2층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며
눈 안에 모든 물건들을 소유하고서  
또다시 내게 부족한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부족한가
값비싼 옷가지들이, 새로운 가전제품들이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유리 진열장 안의
보석들이 내 가슴에 반짝거리며 매장된다
부족한 내 마음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가득 채운 마음이 사람들의 지갑을 슬쩍 쓰다듬다
마음을 회계하며
재활용이 없는 백화점에서 재활용이 된다
재활용이 되어 취직을 한다
잃어버린 것들을 재활용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길가에서 잃어버린 사랑도
백화점에서 팔아 사랑을 얻기 위해 일을 한다
그 사랑에 붙은 가격표가 비싸면 비쌀수록
커져 가는 내 소유욕의 더 큰 원동력이 될 테니
내가 산 그 사랑은 나를 부자로 만들 테니
부족한 그리움을 채울 수 있을 테니
백화점 밖으로 나오니 길 건너 과일가게에서
재활용이 될 빈 박스들을 가지런히 내다놓고 있었다.


















< 종기 >

손등에 불침을 놓은 듯한 작은 종기는
시끄럽고 의심스런 붉은 싹
창문 틈 사이 비를 맞는다
가벼운 간지러움과 젖은 절망과 허술한 희망 사이
잠시 뿐인 관심은 날이 개자
하늘로 날아갔다
삶의 골을 파가는 날
어려운 자리, 고향에 태어나고 자라 끙끙대는 것
긴 한숨이
달콤한 약으로 달래며 가려움을 참지만,
이 땅에 분노는 소리의 뼈가 되었다
잠시 고개를 돌린 여름, 덜컥,
피를 토해낸 것처럼 상기돼 있던
그 어려운 얼굴
잠이 덜 깬, 얼음이라도 땅을 지나가고 나면
다시 비가 내리며 통통 부은 손마디로 시퍼런 고름을
긴 눈물로 게워낸다
매운 소독은 자국을 남긴다
그곳엔,
아직 비가 창 밖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 헌혈은 커뮤니케이션이다 >

시린 손 내밀며
바다를 향해 겨울을 던진다
파도가 언 체 큰 어항의 유리 마냥
똑똑 소리를 내고 깨지기도 하고

그래서 어딘가 멀리 가져가 버릴 수 있다면
찬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그리움을 담을 수 있다면
추워도 떨지 않으리
겨울의 수위가 온도계 속에서
상대방이 결정되지 않은

대화를 나눈다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가
낮은 기압의 등고선을 따라 꿈틀거리며
녹아버린 추억을
이제 조용히 내려놓고서
팔에 난 틈새를 살며시 막는다

아직 누군가의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있다





















<정신의 육체>

거울을 본다
비만한 정신은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없다
거울에 낀 먼지가 머리통 안에도 끼었다.
휴지로 먼지를 닦는다
성기에 묻은 정액을 닦듯 숨어있는,
그리고 부끄러운 욕망을 닦는다
거울을 보는 것은 눈,
눈동자 더 정확히 말하면 시신경,
결국 머리가 거울을 본다
비만한 정신의 비리를
어떻게 잘라낼까 걱정한다
이젠 물수건으로도 거울을 닦아 본다
물기가 뽀도독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면
물수건을 던져 버린다
아직 겁먹은 물기가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거울은 우리의 땅처럼 스며서 숨을 곳이 없다
거울의 뒷면은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영양분도 없는 곳
정신을 비추는 거울이 차가운 어름처럼 녹고 있다
다 녹아 없어지고 나면 정신이 깨끗해질 수 있을까
거울의 뒷면에 숨어 있던 육체가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박장대소를 하고 있다




















<쌓인 벽돌>

그대, 잠시 쉬어가야 할 때도 있지
한나절 벽돌을 나르다
쌓인 벽돌 의자 삼아 앉아 담배를 꺼낸다
긴 식도 어디쯤엔가 느껴지는 이 허기는
무엇일까 분명 잘못 된 것이다. 공복의 방귀는
쌓이는 소리를 내는 법 없이
잘못 놓인 벽돌들 얼굴 붉힌 자리만 뜨면
체온 정도야 유지되는 것 아닐까
달리는 고급 자동차 바퀴에 먼지가 일지만
숨쉬는 걸 두려워 할 이유는 없지 그렇다고
벽돌 쌓인 높낮이를 굳이 탓할 필요 또한 없지
논리적으로 혹은 기호학적으로 삶을 설득할 능력을 갖춰야해도
허한 그 비움의 존재, 배 속 존엄성에 대해
쓴웃음을 나누는 분별력 또한 가져야해도
혼자 그리울 때가 되면
나지막이 사랑 노래 한 소절 읊조릴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진열 제과점 빵 같은 그녀는 분명 그랬다 하루 종일
저온 숙성의 삶을 기다리며 작은 눈알을 헤아리다
꿈을 꾸는 것이라 했다 사랑만으로는 못산다 했다
마치 이 벽돌들이 차곡차곡 시멘트에 발목을 잡히면
일어나는 감정의 두 가지 상태, 체념과 포용
그 사이에 끼워 넣을 두려움을 상상하는 일 따위와 같은 것이리라
도대체 저 이층집 젖은 옷가지를 말리며 차를 마시는
살진 아줌마의 꿈들보다 무엇이 모자라며
무엇이 넘치는가 그럼,
시계를 봐가며 사랑할 필요는 없지
지나가는 사람들 한 번쯤 세우고 몇 마디 하게 하는
근사한 집이라도 세워지면, 우린
그 중간에 쌓인 걸 자랑스러워하겠지만
집의 내구성이나 수명을 헤아리는 발 빠른 계산정도야
누구나 하는 것 언젠가,
가끔씩은 끌어안기 힘들었던
서로의 무게에 푸념하겠지
아직도 제자리인 오랜 기억을
우리의 빈자리를 지우는 어색한 추억 따위를











<하수구에 뜬 달 천장에 가렸네>

한적한 하수구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속물이다
취한 몸 해거름 게워내는 밤마다
덜 마른 마른안주를
간장 섞어 까매진 부침개를 다시 섞어
하수구에 버릴 때마다
누군가를 찾는다, 그대를 부른다
달은 냄새가 없어 냄새가 안나
하지만 냄새가 나는 걸
여기 뜬 달은 냄새가,
지독한 냄새가 난다
내 안에 있던 냄새와 똑같은 냄새가

형광등이 깜박깜박 졸다가 깨다가 하는
그대의 자취방에는 달이 안 뜬다
천장에 가려버렸다
그때마다 그대의 눈망울이 보고 싶었다
언제쯤 저 수면 두꺼운 층층을 벗겨 볼 수가 있을까
언젠가, 검은 하수구물에 던진 조약돌은
첫사랑을 고백한 무중력 상태
저 천장으로 비가 스민다
어느 틈일까
아무리 거친 자맥질로도 달을 보지 못한다
왜 찰기 없는 꿈만 꾸는가
어디까지 몸을 뒤척여야
그대 눈에 뜬 달을 볼 수가 있을까
이렇게 꽉 막힌 천장만 바라본다는 권태덩어리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하지
이, 불면증

달은 냄새가 없다
하지만 냄새가 난다.












<역사(驛舍)의 역사(歷史)>

한동안 이 역사엔 그대를 그리워한 가뭄 들어
좁은 입구 한 켠 사람 손자국 같은 수도꼭지가
목마른 행로를 기다리며 뚝뚝 물을 모으고 있었다
목마름을 안고 우리 모두 처음으로 흘러가고, 또
그 목마름조차 증발되었지만
한 칸 지붕 아래 날숨의 흉위를 짐작한 바람이나
숙취로 남은 빈 술병의 울림이나 기름때 묻은 흰 손장갑처럼
반쯤 타다만 석탄은 물 주위에 모여
해갈을 꿈꾸고 있다 희망을 숨어서 기다리는 얼굴이나
금의환향을 축하하는 행렬은 없다
귓바퀴를 맴도는 고향행 기차정적에
흰 장갑 허공을 적셔 빨간 깃발을 흔들 때
수런대며 차표를 꺼내는 귀향객들의 명절 같은 웃음이
역 뒤 저수지에 수몰되어 젖었는가 숨어있는가
드러나지 않는 윤회의 감옥이 자리 잡은 창에는
먼지와 거미줄과 금이 간 유리가 침전되어
소외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가끔씩은 사랑의 안부를 묻는 편지 한 장이
먼 고향을 기억하는 어스름 노년이
그대처럼 기름때 묻힐 일자리마저 없는,
집 떠나 정처 없는 발걸음이
온몸에 취기를 묻혀 잠시 머물다가서
가뭄은 사시사철 홍수가 되어버린 고향을 걱정하였다
막차가 철길 위로 외로운 불꽃들을 만나며 지나칠 때면
이곳 역사 입구 옆 조그만 손전등은
누구도 보지 않을 일지를 적는다
다만, 갈증을 적신 몇 방울의 물이
환승역의 출발을 소리 없이 알려주었다.











<화장실에서>

너는 소유를 말하지만
나는 사랑의 한 끝을 쥐고 있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있으니
식도부터 차오르는
뱃속 허기의 분노에 관해 배워야 한다
속도 모르면서
하루 종일 어느 제과점의 광고처럼
저온 숙성의 빵을 기다리며
작은 눈알을 헤아리며
배부른 사람들이나 갖고 사는 먹이 사슬과
꿈만 꾸고 나면 부족한 물은 채우고
핀잔을 감수하는 못난 사람들의 몫이 공존하는
유통기한 넘긴 담배 한 모금인데
우리들 손가락 사이로 내리는 비는
이 땅은 그리워하는데
어느 지하철 구석진 변기 안에서
쪼그린 얼굴로 일을 봐야 할 만큼 급한 시간
무엇을 생각하겠나
도시의 소음에 관해 혹은
우리나라 정치현실에 관해
허한 그 비움의 존재에 관해서
이젠 그토록 아는 바 없이 침묵해야 할 때
웃음은 나누는 분별력 또한 가져야 할 때
돌 씹은 얼굴을 처박고 소원을 빈다
제발 비어있는 인내를 감사주소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비가 내린다 으스름 저녁 내린다
비가 수레를 끄는 아저씨의 검은 팔뚝을 본다
푸른 핏줄은 노동의 고통인가 기쁨인가
아저씨의 한 끼 식사인가
아내의 아스라한 병원비인가
건너편 흰 손에 우산, 땅만 쳐다보고 걷는
또 다른 중년의 불그레한 우산이
허공을 날아오른다
하늘은 온통 우산 만하게
침묵, 까만 침묵, 아버지의 침묵
눈감으면 잠시 비가 그칠까
건널목 가에 서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반대편으로 건너오는 소리
신호등 더욱 파래져 시금치 국물처럼
후르르 자전거가 빗물에 튀기며 지나가는 소리
저녁비는 무슨 색일까
비속에서 희망을 품고 서있는 우산 색색이
아버지의 침묵은 하늘색일까
마을 버스를 기다리며 서있는 내 구두 위에
아버지의 구두 위에
과일가게 처마 밑 빗방울 떨어진다
사과 냄새가 난다 사과 만한 빗방울,
수박 만한 빗방울이 차례로 차례로
아버지의 침묵 위로 떨어진다
희망이 침묵 위에 싹이 튼다.



















<오토바이의 나날>

항상 그 곳에 서 있었다
휘발유와 오일 냄새 묻어나는
밝은 채색 네온사인의 동네, 사실
새마을 열차의 속력을 가지고 싶었다
그때마다, 네온사인에서 쏟아지는 별들이
내 안에서 흔들리는 냉각수로 빠지곤 하였다
배달할 음식들 앞에 뱃속 허기를 토해 내고서
사람들의 웃음소리 듣고 싶었다. 허나
웃음은 곧 소음에 가려,
그리움에 꼭 맞는 외로움의 열쇠가
내 심장 출구에 걸리면
피스톤 맥박이 빨라지며 앞으로 간다
일정한 소음을 내면서
아무렇지 않게 이 지상을 달려야만 한다
가끔은 소음이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퀴의 작은 상처가 아스팔트에 부딪쳐
세상이 흔들리는 것인지, 내가 비틀거리는지 모를 만큼
술 취해 어지러운 잡음이
풍화작용처럼 일상엔 존재하는 것이다
앞 거울 두 개를 잃고 별들을 볼 수 없게 될 때도
헤드라이터가 고장 난 밤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귓바퀴 속에서 온통 무게 중심축이 흔들려
세상의 목적지를 원망하고 싶었다
냉각수 안에서 꽁꽁 언 별들은
피스톤 압력에 꽈당 폭파하여
내 전신을 채찍질한다
배기구는 흰 연기 소독차처럼
연소된 별들을 온 동네에 퍼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토바이는 무엇으로 가는가)













<신호>

동전이 하나씩 운전석 옆 통 안으로 떨어진다.
버스는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아침을 내밀며 북적거리는 버스 안
매일 같은 시간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일상들
안으로 안으로 차가운 입김을 밀어 넣고 있는, 어쩌면
가끔씩은 본 얼굴들이다.
그들의 사연을 일일이 챙길 수 없는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 아니라며,
눈이 오는 하늘에 위로해 보지만
목적지를 알리는 안내방송은 어제와 똑같다.
이 무게를 세우는 것이
낯익은 정류장과 신호등인 것처럼

손잡이와 함께 의자가 흔들린다.
어느새 덜컥거리는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숨소리를 밀어내야만
내가 숨 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릴 때 배운 도덕에 의하면, 그건
눈안개를 가득 담은 그릇에 빠져야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저 검은 바퀴를 굴려 벗어나야 할 곳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가는

어깨 위의 짐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송글송글 창가에 피로가 맺힌다.















<환풍기>

돌아간다 일찍이 벽 한 쪽, 운명처럼
내 자린 점지되어 있었다
같은 공간 편도 승차권만이
마주치지 못하는 여섯 개 딱딱한 손마디에
쥐어진 삶의 천형
천상 지옥계는 비명조차 녹아드는
열과 압력의 형틀,
열가소성의 고단한 내세였나니
근사한 선박이나 항공기에 추진기로 태어날 꿈들은
이제 차곡차곡 접고서 생을 돈다, 돌아간다
바람피우는 중년의 성욕처럼
때론 바람맞은 짝사랑 열병처럼
소위 내부 기관들은
주인이 되지 못한 것들을
모두 밖으로 배설한다, 시원한가
빨래에 묻은 우울한 먼지들이나 땀내,
즉석복권 긁고 난 뒤 흩어지는
은색 찌꺼기들과 실연 당한 담배연기,
음습한 기생을 꿈꾸는 무성생식 곰팡이들이
푸석푸석 쌓이는 곳
이런저런 작고 가벼운 티끌들이 발효된 티끌세상에서
나는 도인처럼 앉아
가난하고 어린 잡티들을 위해 기도한다
추억을, 번뇌를 버리라 한다, 그리하여
내 밖으로 추방당한 푸석푸석한 소외들이여
이제 더 넓은 세상에서 터를 잡고 환속하라
그대 소외들의 꿈을 번식하라
위험한 도박을 시작하는 앞뒤처럼
지독한 마음 비우기
나는 이렇게 되돌아간다












<외출>

행장 꾸릴 여유도 없이
높은 등고선의 회사를 벗어난다.
양쪽 길엔 너무 밝아 동공을 흐리는
네온사인들 서 있다
더러 받침이 공기에 매장되어 뵈지 않는
간판들이 더욱 환해진다
감은 눈빛 속에 소극장 간판이 흥사단 간판이
학교 간판이 집안 간판, 직장 간판이 차례로
용해되어간다 가로수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비웃듯 눈감고 바라보던 시절이
이데올로기처럼 지나갔다 외로운가
힘겨운가 외롭고 힘겹지 않은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나
오고가는 여자들의 유방에서 떠도는 그리움을
마로니에 탈춤 추는 남자의 바지춤에서 발견한다
그들의 발기된, 그 성실한 그리움은
어디서 해소될 수 있을까
술 깨려고 시간의 아픔을 해장하는 전등불빛이여
그리움 깨려고 격렬히 몸을 움직이는 탈춤의 나날이여.
서로 다른 유방의 유형을 바라보는
발걸음 발걸음 춤을 춘다.
술 취한 맥주 캔이 발효된 사람들 발치에
치이고 있다 삼분의 일쯤 든 맥주가
캔 안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거릴 때마다
바람불면 흔들리는 것들 흔들리지 않는 것들
흔들리는 것을 보고 싶다
흔들리는 것을 한 번 만져 보고 싶다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반성하고 싶다.
탈춤은 어디서 흔들거리고, 술은 어디서 출렁거리며
그리움은 어디에서 머무나
오래된 유방 밖으로의 외출, 혹은 유방 안에서
좀체 끊기지 않는 길이
정직한 신념처럼 도망가고 있다.









<냉장고 안의 자화상>

내 안에서 꺼낼 이것저것을 준비한다
원래 부피보다 조금 자라 슬퍼 보일,
딱딱하게 굳어있을
차가운 심장에 손을 얹는다
심장에서 떨리듯 떨어지는 물방울의 얇은 껍질들
누더기처럼 내 안에 쌓이면
내 모습은 또 얼마나 과장되어 보일 것인가
안으로 안으로 온갖 잡담들이 모여 뻣뻣한 혀를 내민다
여름이 오고 있다 나른한 기억들이 졸리다
귓바퀴 안에서 여기저기 상처 난 소음을 쓰다듬는
햇살 가득한 바람이라도 불면
진실한 사랑 한 번 해보고도 싶지만
그리움 새긴 상처가 아물 무렵
내 속을 꺼내 녹일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지
투명한 동심은 각진 그릇에 담겨있다
빽빽한 사각의 틀로 몰아대는 온도계
꾸역꾸역 각자의 모습만을 곱씹기도 하고
더위를 위해 찬바람 사들이기도 하지만
용기 있게 걸어 나와야 한다
두텁게 막은 문은 젖은 가죽처럼 나를 노려본다
안개 같은 냉기가 여린 시야를,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가린다
어렴풋이 자유롭게 하늘거리는
차가운 심장이 따뜻해지고
단단한 얼음이 녹아 맑은 물로 흐르면
수은주 영하의 시간을 청산할 수 있으리
그래서 내 인내는 얼음 녹이기



이    름 : 배 재 형
주민번호 : 730528-1042421
주    소 : 서울 서초구 방배동 780-22 ( 201호 )
연 락 처 : 02) 3449-6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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