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 신인상
- 수상자
- 투고작
김명기-시(2004.11.3)
페이지 정보

본문
등이 가렵다
버림과 비어있음의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요즘은 자꾸 등이 가렵다
뒤꿈치 치켜들고 몸을 비틀며
어깨 너머 허리 너머 아무리 손을 뻗어도
뒤틀린 생각만 가려움에 묻어 손끝에 돋아난다
나와 내 몸 사이에도
이렇듯 한치 아득한 장벽이 있다는 것이
두렵고 신비스럽다
빛과 어둠,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 정수리 어디쯤
죽음에 이르려야 열리는 문이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 같고
때론 소슬바람에도 쉬 무너질 것 같은 그 무엇이
내 안 어딘가 덜컹거리고 있다
등이 가려울 때마다
등줄기 너머 보이지 않는 길들이 그립다.
아스피린
대청봉 찬서리 품안에 보듬고
아스피린 한 알로 잠재우시는 어머니
설악의 나무들이 우우우 동해로 몰려와
겨울 옷을 벗고
첨벙첨벙 물놀이 하는 날이면
동해 길은 온통 안개꽃밭입니다
이만쯤이면
당신의 관절에 일던 바람도 덜커덩 문턱을 넘어, 우루룩 동해로 달려가 저마다 수평선이 되었다가 배경이 되었다가, 슬며시 안개꽃밭 일구며, 어머니
당신의 잠 속에
아스피린 알알이 안개꽃 되어 흰 눈처럼 쌓입니다.
곶감
연緣줄을 푼다
발갖 벗은 몸
이승의 추녀 끝에 매달려
그 푸르던 날의 시간
아득히 솟구치던 그리운 열망들
들녘에 묻고
다시 밟지 않을 싸늘한 배경
빈 가지 마디마디 인연의 살그림자 푼다
연줄을 푼다
온몸이 노을이 되고
염주마디가 되어
바람 한 티끌에도
피와 살이 마를수록 가벼워지는 저 고통
눈부신 적멸의 몸짓이여.
노래방 가다
생각이 많은 날에는 노래방 간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다시 기억을 부르는 동안
내 안 어디선가 훠이 워이 타오르는 반항의 시간들
장대 비 내리듯
생각이 온 몸을 적셔오면
빗줄기가 던져놓는 부호를 따라 터벅터벅 노래방 간다
그 곳에 가면
잘난 인생도 못난 사람도 모두 다 1/2 박자
절반은 그리움, 남은 것은 모두가 건배뿐이다
생각이 깊은 날이면
내 몸 어디선가 훠이 워이 기억이 부르는 빈 길을 따라
나 홀로 노래방 간다
잊혀져 가는 것을 위하여
잊어야 할 것을 위하여
자화상
- 백지
새벽 두 시
누군가 내 안을 뒤척이고 있다.
가슴 빗장 걸어놓고
기억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한 뒤
어금니 깨물며, 팍팍
눈물 틈새까지 조여도
곁눈짓도 염치도 없이
내 안을 파고드는 이놈은
숨통도 아니 달고 사는 어느 시대의 분비물인가
어둠 속에서, 때론 어둠 밖에서
울다가 웃다가 웃다가 울다가
저 혼자 낄낄거린다
“너도 알지?
세상 속 모든 길은 비매품이라는 것“
저벅저벅 허공을 오른다
이리저리 세상 길 엿보다 달빛에 채여
창가에 이마를 부딪힌다
부서진다. 아무 일도
없는 듯
흩어졌다 쌓이는 저 시간 속 무형의 그림자
산을 오르다 보면
잘못 든 길도 산 안에 품 속임을
온 몸이 산이 되고
숲이 되어
길을 헤치다 보면
지친 발길 절망 아래
낯선 풀꽃들이 발등에 올라
환한 얼굴로 적막을 밀 때
잎새마다 山門을 여는 바람의 몸짓을 본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 고요
솔잎 하나 흔들림에도 모든 산이 일어나
저마다 말씀이 되고 길이 되는 허공의 신비
山頂에 닿으면 만날 수 있을까
손금 속에 펼쳐진 기억의 능선마다
빗나간 함성
어지러운 욕망의 조각들
山頂에 오르면 버릴 수 있을까
만천동의 봄
다시 봄이 오고
거리마다 황사바람이 빨랫줄에 널린 햇살 털어도
몇 해 전 나물 캐러 떠난
아내의 봄 소식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문 밖에는 온통 길뿐인데
강둑 따라 저 길은 어느 노을에 묻혀
제 기억의 몸을 푸는지
창을 열면
산그림자 돌아선 빈 들녘 어귀마다
달빛 서걱이는 소리
떠난 자도 돌아선 자도
내 안의 길이라고
만천동 봄은 제 홀로 어둠을 지우네
이 땅 모든 약속 풀어놓고
복사꽃 휘날리며
제 홀로 바람이 되고 길이 되어
새벽을 건너네
대포동 窓
- 비 오는 밤
어둠이 제 무게에 밀리어 무너져 내리는 밤
뚜욱, 뚝 처마 끝에 떨어지는
밤의 숨결을 따라가면
부서진 창 너머
갈매기 울음이 들린다.
동해의 모든 파도를 끌고와
하얗게 하얗게 나이테를 돌며
가슴 풀어놓고
눈물 밖으로 날아가는
대포동 갈매기여
아야진, 겨울 동백꽃 아래서
겨울 바다를 흠모하다가
아야진 유리집 앞에서 마음만 들켰습니다.
그대는 일월 한 언저리에 시린 몸을 열고
이 땅 모든 길들의 그리움을 불러모아
제 향기를 태우며
동해 길 이랑마다 안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눈이 내렸지요.
그대 붉은 입술 위로 하얗게 파도가 쌓이고
당신마저 바다가 되어 떠난 뒤
오랫동안 그대 빈 자리에 서서, 나는
왜 冬白의 바다가 될 수 없는지
차마, 돌아서는 어깨 너머로 그대는
한 움큼 파도를 얹혀주며 말했지요.
아야진 앞 바다에서는 아파하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겨울 봄날 사이
네 안의 뜨락에 피었다 지는 무형의
꽃길 같은 것이라고.
천제단 가는 길 (1)
(1)
아직은 먼 새벽
태초의 정적도 이러했을까
산마저 몽정에 취한 듯 어둠을 풀지 않는
이 아득한 고요 문전에
잎새마다 밤깃 털어내리는 소리
분주히 下山을 서두르는 물의 발자국 소리
골마다 물안개 가득한데
길과 길 사이
헤아리는 돌계단 마음 매듭마다
희미한 손전등 제 그림자에 묻혀, 나는
무엇을 찾으려 이 능선을 오르는 것일까.
오르면
다가설수록 더 깊은 부름이 되어
그리움이 되어
아득히 멀어지는 정상
정상은 네 발 아래 있다고
발 끝에 채이는 어둠은 불끈불끈
산 허리 곧추 세우며 길을 막는다
(2)
문수봉 돌아 바라보는 천제단
바람은 지친 발자국을 챙겨 모아, 다시
산을 이루고
내딛는 발길 산 어귀마다 누군가 자꾸 부름이 있어, 돌아보면
耳鳴의 숲 길 사이로
떠나지 못한 천 년의 生
朱木의 뿌리가 내 발목 부여안고 빈 몸뚱아리 내민다.
보아라. (2)
세상 길 인연이 깊으면 그리움의 죄도 깊나니
티끌도 아닌 것이 너도 내 품에 안겨
바람 따라 출렁이는 능선이 되라 하네
217-060
주소: 강원도 속초시 교동 760-14 `명화랑`내
김명기 p:011-371-4020
양력: 59년. 속초출생
91년. `문학과지역` 시부 신인상
92년. `문학세계` 시부 신인상
현. 속초 `시마을사람들` 동인
추천0
- 이전글최윤희-시(2004.11.4) 1차심의 04.11.15
- 다음글배재형-시(2004.10.2) 04.11.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