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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수필_김아영_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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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37회 작성일 17-04-24 08:34

본문

<수필 부문>


성명: 김아영

성별:

연령: 27세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문대로201번길 30 우미아파트 21031106

연락처: 010-4680-0101

 

 

 

 

 

 

 

 

 

 

 

 

 

 

 

 

 

 

 

 

[수필]

<몸이 맘과 멀어질 때>

 

몸은 살아있다는 유일한 근거다. 몸은 개인이 존재하는 최소한의 공간이며, 지나간 시간이 정직하게 기록되는 조각상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모두 하나의 몸을 부여받았고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세상 모두가 공평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몸을 여러 개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돈으로 다른 몸을 사는 것이다. 물론 그 몸에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표현이 다소 과격하긴 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용이다. 고용은 다른 몸에게 내 몸이 할 일을 넘기는 행위다. 임무를 부여받은 몸은 대가를 받고 고용주가 지시한 업무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소모한다. 고용자는 중추신경이고 피고용자는 운동신경이다. 이런 사이에 명령 거부는 있을 수 없다. 드물긴 하지만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노사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관계에서는 지시, 명령이 아니라 협의의 방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인 회사만 찾아다니다가는 거리로 내쫓기기 딱 좋다. 일단 먹고 입고 자는 걸 해결하느라 절대적인 다수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 때로는 할 수 없는데도 억지로 해내야하는 일을 맡아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대개 말단 신경까지 밀려 내려오는 업무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이런 삶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존중은 힘들기만 하다. 몸은 어떻게 해서든 하루 한 끼라도 연료를 넣어야 하는 부담스런 존재고 늘 피로가 쌓여서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무거운 짐이나 진배없다. 마치 몸이 생명의 근거가 아니라 고통의 근거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다. 몸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언제라도 죽음의 문턱을 넘어설 것 같은 두려움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각종 질병 이름을 들먹이며 협박하듯 건강한 생활을 강조하는 언론 매체는 몸에 대한 애정을 회복시켜주는 게 아니라 불안함만 더 키워준다. 분명한 건, 몸에 대한 존중 없이는 삶에 대한 만족도 없다.

뜬금없지만 최근에 춤을 춘 적이 있는가? 일단 나부터가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춤춘 기억은 아득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배우지 않아서 출 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하지만 춤은 배워서 추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음악을 듣고 스스로 몸을 움직인다. 어깨를 들썩이거나 박수를 치고 엉덩이를 씰룩거린다. 아이의 몸은 마음을 표현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어른은 어떤가? 술이나 한 잔 걸치고 고삐가 반쯤 풀리지 않고서는 노래방에서 노래 한 곡 완창하기도 힘들다. 마음과 몸의 불일치에 길들여진 결과다. 먹고 살면 된 거 아니냐고 묻는 어르신들도 계시지만 삶의 지향점이 그렇게 간단하다면 인류의 역사는 훨씬 간명해졌을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감추고 참고 또 참는 것은 마음에 생각보다 훨씬 큰 타격을 준다. 겉으로 보기에 사지는 멀쩡할지 몰라도 정작 마음은 중병에 들었거나 심각한 장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만 움직여온 몸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 춤이라니 생각만 해도 쑥스럽고 바보 같은 짓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몸에 대한 존중에 첫걸음은 아무런 자기 검열 없이 춤을 춰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가 작아서, 다리가 두꺼워서, 너무 말라서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어떤 몸이든 저마다의 움직임이 있다. 중요한 건 온전히 자기 의사에 따라 몸을 움직이려는 시도다.

몸이 표현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걸 현대인들은 너무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정확히 말하면 잊도록 강요당했다. 춤의 기능조차 무대 위의 가수들에게 양도해버리고 얌전한 구경꾼의 위치에 머물러야 했다. 대신 우리의 일기장은 더 두꺼워졌다. 일그러진 욕망과 쉴 새 없이 그어지는 상처들이 마음 속 일기장에 자리 잡았고 분노와 억울함에 휩싸여 마음 속 이야기를 휘갈겨 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누군가 행여나 마음을 알아챌까봐 진심으로 향하는 길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마음속에 산과 바다와 들을 품은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엔 자연이 아닌 도시가 존재한다. 고층 아파트처럼 층층이 쌓인 해묵은 감정들이 있고 미처 해소하지 못한 불만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터져 나온다. 슬럼가에서는 매일 같이 범죄를 꿈꾸면서 한편으론 번화가에서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한껏 꾸미고 다닌다. 마음은 자신을 깊숙이 감추려는 몸을 미워하고 몸은 비협조적으로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마음을 미워한다.

당장 인터넷을 켜보면 포털사이트 메인에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한 탭이 눈에 띈다. 이 분야에서도 유행이 심한 것이 블루베리가 대세였던 게 요새는 아사이베리, 아보카도가 주력 상품이다. 유명 모델이 방송에서 먹은 요구르트는 곧바로 제품명과 생산회사가 인터넷에 떠돌며 광고가 된다. 날씬하고 건강한 몸은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지방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이 아닌 시간에 관한 몸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모두 극심한 저체중이다. 회사를 위해, 가족을 위해, 연인을 위해, 친구를 위해 내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정작 내 마음대로 작은 일이라도 하려고 보면 체력은 이미 바닥나 있다. 하루를 되돌아보면 가장 바빴던 것은 눈 근육이다. 스마트폰으로, 태블릿으로, TV로 내 행복을 대행하는 사람들의 삶을 지켜본다. 화면 속의 사람들이 웃을 때마다 자신도 따라 웃는다. 행복한 세상이란 저기 뿐이다. 마치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 같다. 나 대신 해외여행을 가기도 하고 손에 꼽히는 맛집에 가기도 하고 서로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을 아무리 잘 편집한들, 저렇게 즐거운 장면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다. 씁쓸한 건 이런 생각을 하는 이 순간에도 타인의 행복을 바라보기만 할 뿐 정작 내 몸은 축 늘어져 단 한 발짝도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 몸의 시간을 다른 이를 위해 쓰느라 바빴다고 해도 내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짓은 하는 게 아닌데

 

 

 

 

 

[수필]

<소비 혁명>

 

지구에는 74억 명의 인간이 살아가고 있다. 지난 40년 간 두 배로 늘어난 인구다. 그 사이 야생동물은 절반으로 줄었다. 80만 년 간 이산화탄소 농도는 가장 높아졌다. 1세기가 지나며 지구는 0.7더 뜨거워졌고 이대로라면 2100년 평균 기온은 지금보다 6상승하게 된다. 생명체의 95%가 멸종된다는 소리다. 인간은 뭔가 길을 잘못 들어도 단단히 잘못 들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나리오를 따라가고 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지금에라도 우리의 삶을 되짚어보자.

가장 먼저 산업 성장의 동력이 된 과학 기술의 발전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현대 과학의 기술은 마술보다 신기할 정도다. 신기술이 발명되면 방송, 통신 매체는 곧바로 소식을 알리고 우리는 고도화된 문명 수준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감탄하기 바쁘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기술은 단지 학문적 성과에 머무르지 않는다. 상용화 단계로 나아간다. 음성 인식이 되는 TV, 통신 기능을 겸비한 자동차, 터치스크린을 갖춘 허브 냉장고까지 편리함을 최고의 가치로 지향하는 전자제품이 줄줄이 쏟아진다. 기업은 소비자를 자극해서 판매를 촉진한다. 안 사면 그만이 아니다. 신기술이 하나 나오는 순간 소비자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신제품의 소비가 확산되면서 곧 생필품이 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2G폰을 쓰는 이용자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핸드폰 좀 교체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았다. 그 사람과는 스마트폰끼리만 통용되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는 통신사로부터 서비스 종료 예고를 받는다. 돌이켜보면 현대 생활에서 공공연히 생필품으로 불리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노트북, 스마트폰, 텔레비전굵직한 것만 세어 봐도 벌써 꽤 된다. 여기에 스마트 워치나 홈시어터도 조만간 추가될 조짐이 보인다. 이게 그토록 과학기술이 지향하던 편리함이던가?

편리함의 정체가 뭘까? 노동력을 줄이고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다. 그렇게 체력과 시간을 절약해서 우리는 그 잉여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유를 되찾았는가? 아니다. 그만큼 헐거워진 시간에 또 다른 일거리가 곧바로 자리를 차지했다. 역설적이게도 생필품이 효율적일수록 인간은 더 많은 노동의 의무를 짊어지었다. 한 시간 동안 세탁기, 청소기, 인덕션을 활용에 세탁, 청소, 요리를 해내도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더구나 통신 기기의 발달로 24시간 내내 연락 대기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고 교통수단의 발달은 업무에 있어서 활동 범위를 더 넓혀주었다. 이렇게까지 빽빽한 일정으로 하루를 보내다가 어쩌다가 틈이 나더라도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거나 광고성 기사를 보는데 그치고 만다. 여기서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편리함의 탈을 쓰고 다가온 가전제품들은 시간을 절약해주는 게 아니라 하루의 밀도를 높여주는 것에 그친다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환경 문제는 절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들은 이미 선진국들이 충분히 부를 획득한 후 이제 와서 환경 운운하는 것은 저소득 국가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환경단체에서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다국적 기업들은 여전히 이익을 창출해낼 수 있는 시장만 있다면 새로운 공장을 세우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솔직히 지구의 자정 능력이 어마어마해서 아직까지 이상 징조나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연 파괴는 지금보다 더 급속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생태계가 붕괴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뒤늦게라도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일정 부분 생태계가 파괴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큰 착오였다. 일단 그렇게 큰 희생을 치러서라도 얻은 편리가 명확히 편리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고 생태계는 어느 한 부분만 떼어놓고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부가 무너지면 곧바로 연쇄작용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는 구조였다. 과학과 산업이 결합해 열심히 시장 규모를 키워나가기 시작했을 때 누가 환경 문제를 짐작이나 했을까. 설령 짐작했다 하더라도 발언하는 순간 묵살 당했을 것이다. , 뒤늦게라도 우리는 그동안의 행보를 반성하고 있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단의 서두에 말했듯이 개인 한 명 한 명이 종이컵 대신 머그잔을 이용하고 일회용 나무젓가락 사용을 줄이며 사용하지 않는 플러그를 뽑아두는 습관을 기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전히 이익 창출에 목마른 거대 기업들이 막대한 자본을 들여 밀림의 일부를 파괴하고 농장이나 공장을 짓는 순간 소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국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한 것은 생활 습관보다도 소비 습관이다.

소비의 행태가 바뀌는 일은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소비할 때 상품의 시장 가치만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폐기되는 과정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이 일은 꽤나 까다롭고 큰 불편을 감수해야하기에 소비자들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게다가 아까 말했듯이 혁명에 가까울 정도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세계화의 가장 대표적인 표본이라 할 수 있는 햄버거를 예로 들어보자. 햄버거는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품목이다. 잘 생기고 예쁜 연예인이 나와 햄버거를 들고 한 입 맛있게 먹는다. 철판 위에서는 육즙이 가득한 고기 패티가 익어가고 신선한 양상추와 토마토가 빵 위에 얹어진다. 거기다 한 달 동안만 특별 세일을 한다는 안내까지 한다. 신제품을 먹으면 사은품도 준단다. 소비자는 광고 모델에 대한 호감, 먹음직스럽게 연출된 식재료, 경제적인 가격, 무료로 얻을 수 있는 한정판 사은품, 믿음직스런 원산지 표기 등에 마음이 흔들려 햄버거 하나를 구입한다. 햄버거 하나가 고스란히 뱃속에 들어가고 소비 활동은 끝난다. 하지만 소비 혁명을 위해선 소비의 범위를 더 넓혀야 한다. 일단 광고는 절대 솔직하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늘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햄버거 하나를 먹을 때마다 얼마만큼의 열대림이 사라지는지, 사육되는 소에서 얼마만큼의 가스가 나오는지 언질조차 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니 소비의 대상을 눈앞에 보이는 완제품에 두어선 안 된다. 제품의 생산을 위해 희생된 부분까지 우리는 구매하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상품의 시장가치에만 주목하는 것은 감춰진 희생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렇게까지 고려 범위를 넓히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실제로 잘 포장된 상품 뒤에 무엇이 얼마만큼 희생되었는지 일일이 알기 어려울 뿐더러 직접 생산에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기도 힘들다. 하지만 혁명은 늘 위급한 순간 새로운 변화를 위해 극적으로 등장했다. 나는 암울한 전망이 현실이 되기 전에 분명 우리의 행동이 변할 것을 믿는다. 또 다른 행성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도피적인 수단을 택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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