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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김아영_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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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설 부문>
성명: 김아영
성별: 여
연령: 27세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북문대로201번길 30 우미아파트 2차 103동 1106호
연락처: 010-4680-0101
[소설]
<킬링 타임>
바바는 정말 잘 걸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심심하지 않게 간식과도 같은 생각들이 들어있었다. 바바는 가볍고 바삭한 생각거리를 하나씩 꺼내어 와삭와삭 씹어 먹었다. 바바의 입이 일자로 쭉 찢어지면서 양 입 꼬리가 볼 살에 파묻혔다. 바바는 혼자 즐거운 생각을 할 때 저절로 웃어버리곤 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보지 않도록 일부러 입을 다물고 웃는 법을 터득했다.
‘슬슬 잠자리를 구해야겠는데. 해가 지고 있어.’
바바는 스마트폰으로 지도앱을 실행시켰다. 현재위치를 중심으로 주변 건물을 살폈다. 지금까지 열흘 간 걸어오면서 바바는 교회, 성당, 절, 민속촌, 농촌 이장님 댁, 지금은 해외에 거주 중인 지인의 빈 집 등에서 묵어왔다. 바바는 먼저 교회가 있는지 살폈다. 꽤 큰 규모의 교회가 있긴 했지만 여기서 1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미 10시간이나 걸어온 바바는 차선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100m도 안 되는 곳에 국립대학교가 있었다. 바바는 그 중 아무 강의실이나 빌려 쪽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강의가 끝나고도 남을 시각이라 교정에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다만 축구팀 선수들이 잔디 운동장에서 가볍게 뛰며 훈련 중이었다. 바바는 그들이 내뿜는 젊음의 기운이 보기 좋아서 계단에 잠시 앉아 구경하기로 했다.
“여기 학생이신가요?”
바바가 상냥한 여자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한 여자가 옆에 서 있었다.
“네. 국문학과 2학년이에요.”
바바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면서 재빨리 여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여자의 머리는 미용실 한 번 가보지 못한 사람처럼 잔머리가 위로 솟아 있는 채로 뒤로 질끈 묶여 있었고 안경은 자신의 각진 얼굴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사각 뿔테였으며 노란 남방과 청바지는 그녀의 젊음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루함을 돋보이게 했다. 바바는 그녀가 양팔로 끌어안고 있는 파일에 새겨진 명칭을 보고 그녀의 소속을 짚어보았다.
“혹시 학생회 소속이신가요?” 바바가 물었다.
“네. 홍보부장을 맡고 있는 XX학번 나미리입니다. 아까 국문학과라고 하셨는데 학생증 좀 볼 수 있을까요?”
“학생회가 언제부터 경찰처럼 굴기 시작했죠?”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요. 하지만 이 학교 학생이라면 알고 있겠죠? 최근 이방인 때문에 범죄 사건이 있었잖아요.”
바바는 미리가 모호하게 표현한 범죄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 탄로 나는 때 곧바로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 날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얼굴에 묻은 씻어내지 못한 때와 오랫동안 옷에 스며든 땀 냄새, 대학생의 짐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배낭이 이미 미리에게 상당한 의심을 사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할 게요. 사실 전 휴학생이에요. 휴학한 지는 이 년 됐고요. 다음 학기에 복학하는데 보다시피 전 지금 무전여행 중이거든요. 해외 여행갈 여비는 모을 엄두가 안 나서 이럴 바엔 제대로 고생이나 해보자 하는 마음에서요. 어쨌든 학생증은 지금 제 방 서랍 안에 있어서 지금 보여드릴 순 없어요.”
바바의 말을 들은 후 미리는 잠시 놀라워하더니 갑자기 친밀감을 표시했다.
“세상에! 저도 작년에 무전여행을 했어요. 요새 무전여행 하는 학생들은 찾기 힘든데. 게다가 혼자서 하는 거예요? 대단하네요. 어디서 출발했죠? 오늘은 며칠 째에요?”
바바는 우연한 행운에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미리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귀찮은 질문에 일일이 대답했다.
“오늘 밤은 걱정 말아요. 빈 동아리 방에서 자면 되요. 모포랑 간이침대는 제가 갖다 줄게요. 신관에 있는 샤워실을 이용해도 좋아요. 일단 뭐 좀 먹을래요? 저도 아직 저녁 안 먹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정문으로 나가려던 거 아니었나요?”
“부담 갖지 말아요. 저도 작년에 받은 걸 갚으려던 것뿐이니까.”
바바는 미리와 학생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그녀가 자신보다 더 들떠 있다고 느꼈다. 미리는 일 년 전 낯선 사람에게 받은 감동적인 친절의 일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이 베푸는 쪽의 입장이 된 것에 감사함을 표했다. 두 사람이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십 분 전에 마감된 후였다. 주방에서 식판을 세척하는 소리가 요란스레 들렸고 반만 불 켜진 식당에선 다섯 명도 안 되는 학생들이 식사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있었다. 미리는 아쉬운 대로 바바를 매점에 데려갔다. 미리는 마지막 삼각 김밥 한 개와 바나나 우유, 크림빵, 초코바를 계산한 후 비닐봉지에 담아 바바에게 건넸다. 바바는 미리를 향한 처음의 적대감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만 부탁했는데 알아서 끼니까지 챙겨주는 그녀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미리는 클래식기타 동아리와 농구 동아리 문고리를 흔들어보더니 둘 다 잠겨있자 가벼운 한숨을 쉬고 다음 방문 앞에 섰다. ‘광장’이라는 볼드체 글씨가 에이포 용지에 가로로 인쇄되어 붙어 있었다. 미리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고 다행히 문은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광장은 1년 365일 열려 있어요. 아무리 주의를 줘도 소용없더라고요. 그게 오늘처럼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미리는 약속대로 간이침대와 모포를 가지러 학생회실로 갔다. 바바는 혼자 남아 동아리실을 둘러보았다. 철제 책장 하나가 긴 벽을 다 차지하고 있었고 책장은 철학 서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끔 인문학과 사회과학 서적도 눈에 띄었다. 짧은 벽엔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었는데 동아리 회비나 세미나 일정에 관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5평 남짓 되는 공간 한 가운데는 토론에 적합한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바바는 먹다 남은 믹스커피가 든 종이컵 네 개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밤새 인간 본성을 주제로 토론하는 열성적인 젊은이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바바는 불편한 접이식 침대에 누워서도 청춘의 꿈에 둘러싸인 덕에 아늑한 기분을 만끽하며 잠들었다.
바바가 수상한 기운을 느끼고 잠에서 깼을 때 누군가 그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선 이는 바바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형광등을 켜서 방안을 밝혔다. 바바는 키가 작고 얼굴이 큰 낯선 이의 우스운 비율을 확인한 후 조금 긴장을 늦추었다.
“우리 동아리 회원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여기서 자고 있지?”
바바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미리 그 여자가 마음대로 당신을 여기다 박아놨다고? 그 사람은 학생회일 뿐이지 우리 동아리랑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야! 허락을 받으려면 회장인 나한테 받는 게 상식 아닌가?”
바바는 회장의 얼굴이 사나워지자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한 시간만 있으면 동이 틀 것이고 이미 건물 구조는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다른 동아리실로 몸을 피하면 그만이었다. 바바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 하자 회장이 다시 불러 세웠다.
“어딜 마음대로 나가? 이리 와 앉지. 물어볼 게 있으니까.”
바바는 한밤중에 강퍅한 남자와 술래잡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하더라도 회장을 따돌릴 자신은 없었다─ 순순히 회장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휴학을 하고 무전여행을 하고 있다고? 왜지?”
“전 걷는 일이 좋아요. 당신처럼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요. 낯선 곳에서 잠드는 것도 좋아해요.”
“세상에. 너처럼 속편한 사람은 처음이야. 집에 돈이 많나보지?”
“아니요. 오히려 적은 편이에요.”
“후배니까 특별히 충고하는 건데, 나는 말 한 마디 할 힘도 아껴야 할 정도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 지금이라도 당장 복학신청을 하도록 해. 허비할 시간이 아까워 죽겠지만 어쩔 수 없지. 내일 나와 같이 학생과로 가자고.”
“전 지금이 행복해요.”
“닥쳐! 한 푼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남에게 빌붙어 사는 게 행복하다고? 너 때문에 타인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은 안 하나?”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절 반겨주셨어요.”
“생각을 좀 해봐. 너처럼 머리 덥수룩하고 사흘은 굶은 몰골을 한 젊은 사람이 도움을 청하는데 누가 매몰차게 대하겠어? 다들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서 최소한의 배려를 한 것뿐이야.”
“하지만 저에게 좋은 기분을 받았다고 한 사람도 있었어요.”
“가벼운 기분 전환이겠지.”
“그들은 제 의지와 용기를 칭찬했어요. 제가 원하는 대로 제 삶을 끌고 가는 모습을요.”
“개소리. 도태되는 자가 한 명 늘어서 기뻐했겠지. 이제 네 말상대를 해줄 시간을 다 쓴 것 같군. 나중에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한 자로 일 분짜리 뉴스에 나오고 싶지 않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회장은 이후 바바가 어떤 말을 해도 한 마디도 상대하지 않았다. 가져온 노트북을 켜고 자료를 옆에 잔뜩 쌓아둔 채 논문을 쓰는 데에만 집중했다. 갓밝이가 되자 방안이 희붐하게 밝아졌고 회장은 형광등을 껐다.
여덟 시가 지나자 동아리실에 세 명의 사람이 더 왔다. 유선과 동영과 에밀이었다. 그 중 영국에서 온 에밀이 바바에게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전 에밀이에요. 바바 진짜 멋있어요. 저랑 같이 점심 먹을래요? 저 수업 열한 시에 끝나요.”
바바는 밤새 회장에게 지쳐 있었기 때문에 에밀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에밀은 나가기 전 바바의 귀에 비밀을 속삭였다.
“이 동아리 별로예요. 가입신청서는 쓰지 마요.”
에밀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바바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 우리 회원이 부족해서 동아리 지원금이 끊길지도 모른대.” 유선이 말했다.
회장은 바쁘게 자판을 두드리던 두 손을 잠시 멈추고 유선을 치켜떠 보았다.
“너, 내가 논문 쓰는 거 안 보여? 다른 사람이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지나 말아야지. 그게 상식이야! 그리고 회원이 부족한 건 너희가 바보 같이 굴어서 신입생이 안 모이는 거잖아. 철학 동아리에 왔으면 책 좀 읽으라고!”
회장은 신경질적으로 짐을 챙겨서 앞으로는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야겠다며 나가버렸다.
“짜증나는 새끼!”
유선은 회장이 나가고 나서야 시원하게 욕을 했다. 그런 유선을 달래주는 건 동영의 몫이었다.
“진정해. 회장은 이번 학기만 끝나면 졸업이야. 그 때까지만 버티자고.” 동영이 말했다.
“맞아. 그리고 다음 회장은 내가 되는 거지. 나도 이력서에 한 줄 써넣을 거리가 생기는 거야.”
유선은 졸업 후 취업에 대해 가벼운 걱정이라도 하긴 했다. 비록 TV에 나오는 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이 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입학식 때까지 자기가 지원한 학과가 어딘지 헷갈려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거기 바바 씨, 유선이 욕한 건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는데.”
바바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동영을 보고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이 동아리에 들 생각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할 거에요.”
유선이 말하자 이번에 바바는 유선을 보고 또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제해야 하는데 회장 새끼가 기분을 다 망쳐버렸잖아. 잠깐 쉬어야겠어.” 유선이 말했다.
“나도. 십 분 있다가 하자.”
유선과 동영은 각자 스마트폰을 쥐고 페이스북에 탐닉했다. 대부분 빠르게 스크롤바를 넘겼지만 간헐적으로 한 게시물을 반복해서 보며 낄낄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러다 유선이 한 달 전 헤어졌던 여자친구가 새 연인과 찍은 사진을 올린 것을 봤고, 그는 넋이 나간 채 정확히 십오 분을 우울해하다가 다시 즐거운 게시물을 찾아 스크롤을 내렸다. 바바는 두 사람이 기분을 정화하는 과정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확실히 두 사람의 표정은 나른할 정도로 편해보였다. 동영의 얼굴 근육이 바빠질 때는 유명 연예인의 연애 기사를 보고 화를 낼 때뿐이었다.
“야, 서가영랑 이대원이랑 사귄대. 너 알았냐?”
“미친, 둘이 안 어울리지 않아? 서가영이 아깝지.”
“왜 사귀지?”
“세 달 안에 헤어질 걸. 걱정 마.”
“서가영 요새 작품도 안 들어오던데. 열애설 터져서 더 힘들겠다.”
“그러게.”
“잘 돼야 할 텐데.”
“걱정이야.”
“내 말이.”
그리고 한동안 다시 잠잠한 시간이 이어졌다.
“아, 망했어!”
즐거운 유희 생활 중 유선이 갑자기 소리쳤다.
“왜?”
“두 시간이나 지났잖아!”
“안 돼! 나 일 교시 수업 있었단 말이야!”
동영은 성급하게 가방을 돌려 맸다.
“씨발, 전공수업인데.”
“그 교수 중간에 들어오면 출석 체크도 안 해준다며?”
“그러니까!”
“그럼 가지 마. 어차피 결석처리 될 텐데.”
“그럴까?”
“그러라니까.”
“그러지, 뭐.”
동영은 다시 가방을 벗고 앉았다. 기껏 정화된 즐거운 기분은 수업을 빼먹고 과제할 시간을 잃어버린 탓에 다시 짜증으로 물들었다. 다급한 그들은 짜증난 상태로 리포트를 쓰기 시작했다.
“씨발. 엿 같아.”
유선이 시작한 지 오 분도 안 되어 물꼬를 텄다.
“이거 뭐라고 써야 되냐?”
동영이 기다렸다는 듯 유선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도 몰라.”
“나도 하나도 모르겠어.”
“공부 좀 하지 그랬냐, 새끼.”
“너나.”
“난 공부하면 기분이 나빠서 못 하겠드라.”
“기분이 왜 나빠?”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잖아. 그게 기분이 확 상해.”
“병신.”
“병신한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데.”
유선은 가장 손쉽게 성취감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SNS였다. 하루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 같으면 SNS에 가벼운 생각과 충동적인 감정을 올렸다. 이 기록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모아놓고 보면 꽤 많은 양이 되었고 나중에 보면 그래도 뭔가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선은 페이스북 앱을 실행시켰다. 소통이라는 그럴 듯한 명목으로 자기 자랑을 자기 자랑 아닌 듯 세련되게 올리는 공간이었다. 마치 남이 볼 줄 몰랐다는 듯 찍은 셀카와 남이 들을 줄 몰랐다는 듯 적은 독백이 하루에도 수십 개 씩 올라왔다. 유선은 지인들의 그런 가식을 비웃으면서도 그 가식에 걸려들었다.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연출된 사진인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의 인생이 모두 사진처럼 완벽한 구도와 조명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SNS는 행복만 자랑하는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 포장된 비애가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사소한 고민도 최대한 심오하게 표현하는 게 SNS의 어법이었다. 유선은 SNS에 중독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도 굳이 줄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유선은 하루 12시간을 잠으로 보내는 걸로 부모님에게 자라오면서 셀 수 없는 잔소리를 들어왔다. 온갖 방법을 써도 잠은 줄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을 졸라서 얻은 스마트폰이 생기자마자 잠이 저절로 반으로 줄었다. 물론 그 시간을 대체한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잠들지 않고 깨있는 것만으로도 유선은 보람을 느꼈다. 비록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는 순간 눈앞이 침침하고 정신이 몽롱해지더라도 말이다.
“뭐 올릴 거 없나. 카페 음료 사진 올리는 것도 지겹다.”
유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바바 쪽으로 움직였다. 바바는 두 사람의 유희를 구경하다가 지겨워져서 책을 읽고 있었다.
“저기요.”
전과 달리 유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바바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혹시 저희랑 사진 찍을 수 있어요?”
“제 사진을 왜 찍는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요.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서요.”
바바는 이제껏 농사일을 도와드리거나 청소를 도운 적은 있어도 숙박의 대가로 사진을 찍은 적은 없어서 이런 것도 보상이 될 수 있나 망설였다. 바바가 고민하는 동안 두 사람은 슬쩍 바바 옆으로 와서 스마트폰 각도부터 점검했다. 팔이 더 긴 동영이 스마트폰을 왼손으로 들고 45도 각도를 맞춰 위로 팔을 뻗었다. 동영은 다짜고짜 이쪽을 보라고 했고 바바는 어영부영 사진을 찍게 되었다. 촬영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동영이 NLB모자를 앞으로 썼다가 뒤로 썼다가 벗었다가 했고 동영은 가방에서 알 없는 안경을 꺼내 와서 꼈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했다.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고 나서야 동영은 촬영을 끝냈고 심혈을 기울여 한 사진을 고른 후 보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 사진은 SNS친구가 더 많은 동영의 계정에 올라갔고 유선의 이름은 태그되었다. 사진 밑에는 ‘#신기한인연#아프니까청춘이다#용기잃지말기#영원한친구#잊지않을게#무전여행패기#우리모두화이팅’이라는 문구가 이어졌다.
“댓글 많이 달릴까?” 동영이 물었다.
“고양이 사진보단 많아야 되는데.”
“그래도 귀여운 아기사진은 못 이기겠지?”
“아마도.”
바바는 두 사람이 현실 세계 사람이 아니라 SNS 세계에서 소재를 얻으러 잠시 놀러온 사람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피곤한 듯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 바바는 두 사람에게 무기력함이 전염되는 것을 느끼고 자꾸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에밀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동아리실로 돌아왔고 바바는 반갑게 그를 따라 나갔다.
에밀은 바바를 후문 쪽에 있는 식당으로 데려갔다. 메뉴라곤 김치찌개 하나밖에 없어서 주문할 것도 없이 앉자마자 가스버너와 김치찌개가 담긴 냄비가 나왔다. 바바가 맛을 보니 국물이 꽤 매운 편이었다. 하지만 에밀은 매워하는 기색도 없이 국물을 연달아 떠먹었다.
“매운 거 잘 먹어요?” 바바가 물었다.
“매운 거 좋아해요. 김치 맛있어요. 한국 음식 다 최고에요.”
“이렇게 매운 거 잘 먹는 외국인 처음이에요.”
“다들 그래요. 제가 잘 먹으면 사람들이 좋아해요. 특히 국밥, 부대찌개, 족발 먹으면 좋아해요.”
바바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싶었다가 에밀이 유튜버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에밀은 일주일에 세 번 자신의 채널에 동영상을 올리고 있었는데 거의 먹는 것 위주였다. 광장시장에 가서 빈대떡에 막걸리 먹기, 마장동 가서 육회 먹기, 장충동 족발 먹기, 병천 순대 먹기 등 메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에 한정되었다.
“한국 사람들, 외국인이 한국 음식 잘 먹으면 좋아해요. 이것저것 계속 추천해줘요.”
바바는 에밀이 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미숙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이─특히 유럽인이나 미국인이─김치나 고추장을 맛있게 먹으면 한국인들은 얼마나 뿌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지 음식을 먹던 외국인도 그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고 엄지를 척 내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유 노우 김치?’나 ‘두유 노우 치맥?’은 외국인을 만난 지 일 분도 안 되서 나오는 질문들이었다. 한국인들은 음식으로 선진국 국민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했다. 바바는 에밀의 채널 구독자수가 백만이라는 소릴 듣고 입 안에 든 밥풀을 흘릴 정도로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에밀은 지금도 꾸준히 구독자가 늘고 있다고 했다. 요새는 ‘핵불닭볶음면’과 홍어 도전 영상을 준비 중이었다. 에밀이 올리는 영상은 짧으면 4분 길면 10분이었다. 그 영상에 광고가 붙고 스폰서가 생기면 에밀은 그 수입으로 월세를 냈고 남은 돈은 생활비로 썼다. 에밀은 신기해하는 바바에게 자신이 올린 영상을 직접 보여주었다. 바바는 하나만 보려고 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재생 목록에 있는 영상을 다 본 후였다. 바바는 과연 왜 인기가 많은지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봤어요.”
“킬링타임용으로 딱이에요, 이게”
‘시간을 죽인다. 시간을 죽인다….’
바바는 이때껏 죽여야 할 만큼 시간이 많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문득 킬링타임에 죽는 것은 꼭 시간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바바도 영상 찍어 봐요. 여기저기 많이 다녔잖아요. 라이브도 할 수 있어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닌 건 맞지만 바바는 어딜 가든 제 눈에 담으면 그만이었지 사진 한 장 찍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자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서 실시간으로 방송을 한다는 생각은 상상불가의 영역이었다. 인터넷 상에서 자신을 대신해 여행할 사람을 찾는 구경꾼이 넘쳐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교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실내는 사람이 꽉 차서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바바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대학은 평화로운 성이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었고 잔디밭은 넓어서 누구나 누워서 쉴 수 있었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대학생들이 한 팔에 전공 책을 안고 돌아다니는 모습은 막연히 좋은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벤치에 앉아 삐친 여자 친구를 달래주려고 쩔쩔 매는 남학생의 뒷모습도 마냥 귀엽기만 했다. 바바는 대학이 주는 아늑함에 빠져 무거운 배낭을 벗어버리고 책가방을 메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무도 늙지 않고 평생 젊은이로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난 것 같았다.
카페 앞에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바바는 사람들이 모여들 때쯤이야 눈치 챘다. 목소리로 보아 남자와 여자가 다투는 모양이었다. 구경꾼들 틈으로 슬쩍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후 바바는 더욱 집중해서 그 다툼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투는 남녀란 다름 아닌 학생회 소속 나미리와 광장 회장이었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메아리가 생길 정도로 고함을 지른 건 회장이었다. 나미리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바바는 분명 나미리가 회장에게 엄청난 잘못을 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구경꾼 모두가 은근히 같은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도 아닌데 굳이 끼어들 필요가 있나, 하는 눈빛이었다. 바바는 나미리 옆에 서서 이도 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이 다툼이 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불쌍한 남자는 나미리와 겨우 사귄 지 한 달 된 남자친구였다. 그는 회장의 기세에 눌려 여자친구를 당당하게 감싸주지도 못하고, 남자친구라는 이유로 상황을 피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난 안 되고 이 새끼는 된단 말이야? 나는 벌레고 이 새끼는 사람이다 이거야?”
회장은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마치 회장만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나미리는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회장이 쏟아내는 분노를 뒤집어쓰고만 있었다. 하지만 공개적인 구경거리가 되어 온갖 창피를 당하고 있는 나미리는 겉으로만 침착할 뿐, 감정에 압도되기 직전이었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요?”
바바는 에밀에게 물었다. 에밀은 두 사람의 싸움이 그렇게 의외는 아니라는 눈초리였다.
“회장이랑 저 여자랑 일 년을 사귀었어요. 그런데…여자가 스킨십을 안 한대요. 손잡는 것도 소름이 끼친다고 했대요.”
“여자가 회장을 안 좋아한 거 아니에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사랑한다고, 같이 있고 싶다고 하는데 몸이 닿는 건 싫다고 했대요. 미안하다고 자기도 못할 짓인 거 안다고…. 그래도 회장은 기다렸어요. 여자가 괜찮아질 때까지. 무슨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아프면 약도 사다주고─이마에 손 얹는 것도 싫다 해서 문고리에 약봉지만 걸고 나오긴 했지만─맛있는 것도 사주고 하면서 기다렸어요. 그런데 결국 여자가 찼어요. 자기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회장은 일 년을 사귀면서 키스 한 번 못해본 거예요. 가벼운 뽀뽀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기념일에, 그것도 아주 잠깐 했대요. 입술이 떨어지고 여자가 얼마나 징그러운 표정을 지었던지 이후로는 시도할 용기도 나지 않았지만. 불쌍한 회장. 다른 사람은 잘 몰라요. 회장이 저한테만 상담했거든요. 다른 사람한텐 비밀이라며.”
“그럼 여자가 회장과 헤어지고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어서 저러는 건가요?”
“남자가 자기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거든요. 여자친구랑 하는 사진을.”
“뭐라고요?”
“아, 하는 게 아니고, 말을 잘못 했어요. 하고 나서 사진이요. 침대에 나체로 이불만 덮고 있는 사진이요.”
회장의 분노가 쉬이 사그라지지 않자 누군가 학교 직원을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고 그 옆 사람은 사랑싸움에 무슨 그런 걸 부르냐며 웃어넘겼다. 몇몇은 얼굴에 장난기까지 띄고 휴대전화로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을 확인해보니 어느 새 소문을 듣고 나온 동영과 유선이었다. 바바는 나미리와 회장이 눈앞에 보이는 구경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될 것임을 예상했다. 그 때 구경꾼들 사이에서 환호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더 많은 학생들이 휴대전화를 꺼내 녹화 버튼을 눌렀다. 바바는 상황을 파악하고 말을 잃어버렸다. 에밀도 벌떡 일어나 그대로 얼어버렸다. 나미리가 거의 게걸스럽다할 정도로 회장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탐하고 있던 것이다. 나미리의 새 남자친구는 역겹다는 듯 입을 손으로 막았다. 회장은 나미리의 공격적인 도발에 잠시 휘청거리긴 했으나 다시 중심을 잡고 나미리를 바스러질 듯 껴안았다. 혀가 오가는 모습이 빤히 다 보일 정도의 진한 키스였다. 두 사람의 밭은 숨에 여학생들은 고개를 돌리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며 남학생들은 말리려고 껴들었다가 괜히 얼굴에 타박상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격정적인 사랑의 표현은 결국 경찰이 와서 말림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두 사람은 떨어지고 나서 입이 침으로 번들거리면서도 다시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경찰차를 타고 떠나자 남은 구경꾼들은 목격한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뒤풀이를 하느라 바빴다. “미친 거 아냐?” “또라인가봐.” “여자는 학생회 아니었어?” “대박.” 같은 말들이 팝콘처럼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가까운 미래에 댓글이 될 말들이었다. 바바의 예상대로 이 영상은 이주일이 넘도록 SNS에 가장 뜨거운 영상으로 떠올랐고 나미리와 회장의 계정은 욕설로 도배되다가 얼마 못가 폐쇄되었다.
바바의 무전여행은 30일째 되는 날 끝났다. 여행이 끝난 후 바바는 통장의 잔고를 긁어모아 2평도 안 되는 고시텔 방을 구했다. 바바는 외출도 없이 방안에서 하루 종일 여행기를 쓰기만 했다. 글을 쓰다가 바바는 오랜만에 동아리 광장을 떠올렸다. 유독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바바는 잠시 원고를 미뤄두고 휴대전화로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유선의 계정을 찾아가보니 동아리 ‘광장’ 회장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친구 수도 한 달 전에 비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유선의 게시물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이전 회장은 나미리와 함께 휴학계를 내고 잠적한 모양이었다. 유선은 걱정을 가장하여 전 회장의 소식을 들리는 대로 빠짐없이 올리고 있었다. 바바는 자신이 회장의 예언대로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이라도 한다면 그 뉴스 또한 유선의 계정에 올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찍은 사진을 근거로 가까운 사이인 마냥 굴면서 추모하는 문구가 달린 채 말이다. 바바는 문득 액정 안에 갇힌 전 회장을 구해주고 싶었다. 화면 너머 보이는 그가 투명하고 두꺼운 얼음 밑에 깔린 사람 같았다. 사람들은 겨우 손바닥만 한 화면 안에 보이는 동영상을 보고 한 인간을 우스갯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테두리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진실이었다. 바바는 그렇게 믿었다. 휴대전화가 킬링타임용이 될 수 있는 것은 진실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체에서 표본을 채취하듯 입맛에 맞는 부분만 화면 크기에 맞춰 들어내면 그만이었다. 바바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화면 아래로 잠수했다. 아래서 올려다보니 자신이 어디로 들어왔는지도 모를 만큼 수많은 화면이 빛나고 있었다. 바바는 깊이, 더 깊이 헤엄쳤다. 회장은 유선에게 붙들려 있었다. 바바는 회장의 몸통을 붙잡고 있는 유선의 팔을 힘주어 떼어내고 회장을 데리고 도망쳤다. 위로 헤엄쳐 갈수록 점차 빛이 밝아졌다. 하지만 쉽게 입구가 열린 것과 달리 화면엔 출구 기능이 없었다. 바바는 숨이 차서 화면을 두드렸지만 강화 유리로 만들어진 액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바바는 손잡이도 없는 문을 한없이 두드리다 결국 힘이 빠져 의식을 잃었다.
바바가 쓴 여행기는 한 출판사의 제의로 책으로 출판되었다. 편집장은 바바의 원고를 읽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발정 난 커플’ 영상의 현장에 바바가 있었다는 것에 무릎을 쳤다. 출판사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새 글이 올라왔다. 신간 홍보를 위한 글이었다. 사람들은 이름도 낯선 작은 출판사가 낸 흔하디흔한 여행기에 왜 ‘발정 난 커플’이 연관 검색어로 태그 되었는지 궁금해 했다. 바바의 책은 곧 실시간 검색어 목록 9위에 올라갔다. 바바는 버스를 기다리며 휴대전화로 기사를 보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엄지를 움직이던 바바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자신의 책이 식어가던 ‘발정 난 커플’ 영상의 인기에 다시 불을 붙이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접촉이 없자 화면이 저절로 꺼졌다. 바바의 손에 경련이 일었다. 차마 다시 화면을 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새로 온 버스를 타려고 뒤에서 누군가 바바를 밀치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힘없이 휴대전화를 얹어놓고 있다시피 하던 바바의 손은 가벼운 충돌에도 쉽게 물건을 떨어뜨렸다. 휴대전화는 수직으로 바닥에 떨어졌지만 금하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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