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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이예림_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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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
성명: 이예림
성별: 여
연령: 25세
주소: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로 50 솔빛마을주공아파트 114동 902호
연락처: 010-9675-5595
< 청원(請願) >
: 일이 이루어지도록 청하고 원함
: <법률> 국민이 법률에 정한 절차에 따라 손해의 구제, 법률ㆍ명령ㆍ규칙의 개정 및 개폐, 공무원의 파면 따위의 일을 국회ㆍ관공서ㆍ지방 의회 따위에 청구하는 일
- 신문기사 발췌 -
한겨레 [대기업 취업난, 올해 더 심해진다]
아주 경제 [청년 취업난 심각…지난달 새 실업자 10명 중 7명은 20대 후반]
포커스뉴스 [500대 기업 절반 “올 상반기 채용 계획 미정”…취업난 우려]
광주드림 [취업난에 ‘열정페이’ 감수하는 청년들]
베리타스알파 [취준생 64.4%, 극심한 취업난으로 ‘자신감’잃어]
“속보입니다. 극심해진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취업지원규정>이라는 법령을 제정·선포하였습니다. 이 법령은 현재 직업이 없는 국민들을 위한 제도로서 대상자로 뽑힌 사람들은 지역공단으로 발령받게 됩니다. 대상자들은 공단으로 들어가 필수적으로 일을 해야 하고……, 이와 관련하여 지금 대통령의 담화가 있겠으며 정부에서는 수일 내로 대상자들에게 통보 할 예정입니다.”
법령이 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상자들에게 통지서가 날아왔다.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니 주거지 근처에 위치한 지역공단을 방문하라는 친절한 통지서에서는 일종의 압박이 느껴졌다. 공단에서 일을 시작하면 새로운 일자리로 옮겨가기 힘들 것이라는 설명과 기한 내에 공단을 찾아가지 않으면 직접 데리러 올 것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통지서 안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구였다.
해원은 지역공단을 찾아갔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선 희망이 보이기도 했지만 걱정을 감출 수 없는 낯빛도 적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 3 지역공단의 서번트servent로 임명된 박정우입니다. 공단의 관리자이자 정부 대변인으로서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문의사항이 있다면 지금 말씀하셔도 되고 공단 홈페이지를 이용하셔도 됩니다. 여러분을 위한 자유게시판도 있으니 부디 잘 활용해주세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기껏 이런 공장에서 일하려고 스펙을 쌓은 것이 아니라며 투덜거리는 소리, 그럼에도 돈을 벌 수 있어 좋다며 기뻐하는 소리. 웅얼거리며 공기를 떠돌아다니는 소음 가운데서 해원은 저 모든 소리에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전직 기자였던 자신의 새로운 일자리가 공장이라는 것은 꽤나 자존심 상하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쉽게, 그 어떤 이력서나 면접 없이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원은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나 소극적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잘못됐다며 항의하던 과거보단 지금의 삶이 편해졌다는 것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해원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수군거리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가 항의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곧 소음 속으로 묻힐 뿐이었다.
체육관만큼 커다란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쉼 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다. 움직이는 다섯 개의 열은 음계 없는 악보처럼 보인다. 다른 열과 섞이지도 않고 자기 자리만 지키고 앉아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어떤 대화도 없다. 작은 소음만이 일 뿐이다. 공기마저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곳의 고요함을 감히 그 누구도 깨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움직임만이 있을 뿐이다. 긴 머리를 뒤로 한껏 올려 묶은 여자가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물체 위에 또 다른 물체를 덧대고 나사를 조이기 시작한다. 완성된 무언가가 옆자리로 옮겨간다. 옆자리의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는 나사를 풀고 덧댄 물체를 빼낸다. 해체된 무언가는 또 다시 옆자리로 옮겨간다. 다갈색의 머리카락을 부스스하게 늘어뜨린 남자는 물체 위에 또 다른 물체를 덧대고 나사를 조이기 시작한다. 완성된 무언가가 옆자리로 옮겨간다. 그 옆자리의 단발머리를 한 여자는 나사를 풀고 덧댄 물체를 빼낸다. 자신의 일에 홀린 사람들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해체하고 만들고 해체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이 낯선 상황에 금세 적응해버린 지금은 지독히도 흐르지 않는 시간이 지루하기만 했다. 해원은 한숨을 내쉬며 탈의실에서 나와 작업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걸어가던 해원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 피곤하다. 잘 잤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문소현이었다. 간호사 출신인 소현은 해원이 공단에서 처음 사귄 친구로, 해원보다 한 살이 많았고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해 병원에서 일하다가 그만 둔 경우였다. 4년차가 되던 해에 일에 질려 병원을 그만 두었다던 소현은 공단 내에서 누구보다 활기차 보였다. 작업장으로 향해있는 복도를 함께 걷던 중 소현이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해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근데……. 그거 들었어? 옆 작업장의 대상자 한명이…… 어제 자살했대.”
그 말을 들은 순간 해원의 눈은 놀랄 듯이 커졌고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누가? 왜?”
“맨날 우울한 기운 내뿜고 혼자 다니던 남자 있잖아. 그 사람. 근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윗선에서 쉬쉬하는 것 같더라고.”
그의 이름은 몰라도 누군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공단에 들어오고 나서 얼마 뒤에 대상자들끼리 뒤풀이를 가졌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백수가 된 이유 TOP 3’안에 들었던 그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우중충한 분위기에 무기력해 보이던 그는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은 사람이었다. 명문대학교를 졸업한 후 대기업에 입사해 누구보다 기세등등하게 살았을 터였지만,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명예퇴직을 당했다는 이유를 갖고 있었다. 기업의 구조조정에서 젊은이도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였다. 해원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됐을까.
점심시간이 되어 해원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아마 그 남자의 자살사건 때문인 것 같았다. 또다시 찾아온 이상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해원은 고개를 저으며 밥 한 술을 크게 떴다.
“나 같아도 그 남자였다면 자살했겠다.”
“왜? 뭐…… 대기업 다니다가 공단에서 일하면 쪽팔리기는 했겠지. 근데 그게 죽을 만큼 창피한 거야?”
“쪽팔려서 죽었겠냐. 삶의 목표가 없어지니까 그랬겠지. 인생의 회의감? 이런 거 말이야.”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두 남자의 대화소리가 해원의 식사시간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해원은 신경질 적으로 국을 들이켰다.
“하긴……. 지금 여기서 탈출하긴 아무래도 불가능하지……?”
조심스레 말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에선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응. 그렇기도 하고. 근데 말이야. 솔직히, 이건 좀 아니긴 하지. 아무리 백수라지만 그 남자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던 사람이었고, <취업지원규정>만 아니었으면 다른 기업에 취직할 수 있던 거 아냐? 나 같은 취업준비생이야 취업 포기하고 알바나 하려고 했거든. 여기 들어온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그 남자는…….”
두 남자의 잡소리라 생각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대화소리는 해원의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법 진짜 이상하긴 하지. 통지서를 읽으면서, 나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일하는 건 좋은데. 다른 곳으로 이직 불가. 나도 처음에는 진짜 별로라서 뭐라고 하고 싶었는데 딱히 나서는 사람도 없고, 이제는 백수한테 일자리 주고 돈도 준다는데 내가 먼저 거절할 거리도 없더라고. 그냥 이렇게 묻혀가는 게 최고지 뭐.”
“그래, 맞아. 이제 이 얘긴 그만하자. 밥 맛 떨어진다. 어제 밤에 누가 자유게시판에 글하나 올렸다는데 금방 삭제됐대. 가만 보니까 위에서도 쉬쉬하는 거 같은데 괜히 말하다가 찍히면 우리만 귀찮아.”
아무래도 밥이 언칠 것 같았다. 해원은 턱 까지 차올라온 무언가를 내려 보내기 위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이상한 기분이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제 마음 깊숙이 해고라는 이름의 까만 천으로 꽁꽁 싸놓고 숨겨놨던 그것이 다시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좋지만은 않은 이 기분을 해결하고 싶었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했다. 해원은 식당을 빠져나와 서번트가 있는 운영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차해원씨. 무슨 일로?”
서번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해원을 맞이했다.
“대상자 한 명이 자살했다는 거 아세요?”
반면, 해원은 날이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그 얘기군요. 물론 알고 있지요. 그래서 지금 무척 바쁘고요.”
“바쁘시다는 분이 커피는 잘 챙겨 드시네요.”
책상 위에 놓인 커피 잔을 바라보며 해원이 냉소했다. 어차피 그도 정부요원이었으므로 이런 것을 해결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저 땅속으로 묻으려 하겠지. 아무도 들고 일어날 수 없게.
애초에 처음부터 이상한 상황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해원은 자신의 마음 저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공단에는 자살한 남자와 자신처럼 해고당한 이들이 있었고, 소현처럼 쉬고 싶어 직장을 그만 둔 경우도 있었고, 식당의 그들처럼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남자는 왜 자살했을까.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았고 대기업에 취직해 당당히 어깨를 펴고 다녔겠지만 그 결말은 명예퇴직이었다. 해원은 사회부 기자로서 기사를 쓰던 과거를 떠올렸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래로 점점 심각해지던 경제위기는 2016년, 결국 ‘단군 이래 최초로 부모보다 못사는 세대’라는 최악의 흠집을 새겨놓았다. 그 어느 해결책 하나 찾아내지 못한 채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 2047년 현재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취업은 물론 삶까지 포기해 버리고 있다. 사회분위기가 이렇게 되기까지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가? 취업이 되지 않는 것은 개인의 문제라는 것으로 단순하게 치부해버리던 정치인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정책을 내놓았는가? 먼저 대통령의 취업관련 공약을 살펴보면……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에 맞춰 경쾌하게 기사를 쓰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해원의 등 뒤로 그녀의 기사를 지켜보던 조 선배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이쯤에서 그만해, 너도. 얼마 전의 인사이동 때에도 다른 부서로 보내버리겠다는 부장의 협박이 있었지만, 타고난 기자본능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해원은 조 선배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짓고는 기사를 마저 써 내려갔다.
빼곡한 글자들로 가득 채워진 종이들이 허공에서 넘실거리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역시나, 란 생각에 해원은 코끝에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종이를 주우려 허리를 숙였다. 칼날 같은 말솜씨라는 부장의 특기에 알맞게 오늘도 어김없었다. 늘 그래왔던 사람이었지만 이날따라 부장의 말투는 다른 날보다 유독 싸늘했다. 결국 이런 것이었나. 해원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해고통지서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30일분의 해고 수당이 지급되었으니…… 이거 지금 돈이나 먹고 꺼지라는 거야 뭐야. 해원은 통지서를 들고 부장실로 뛰어갔지만 부재중이라는 표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날의 냉소가 떠올랐다. 이미 정권에 잠식된 언론에게 정의와 진실을 말하는 것은 죽음을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은 행동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해원은 자신의 꿈이었던 신문사를 등지며 거리로 나왔다. 그 누구보다도 당차보였던 그녀의 등에는 세상에 대한 무기력함만이 떠돌 뿐이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그녀의 기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해원은 해고당했다. 그때 느꼈던 패배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해고라는 까만 천조가리가 정의를 향한 그녀의 열망을 덮어버렸다. 어쩌면 그는, 자신처럼 무언가를 잃어버렸던 사람이었을지도…….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만큼 나가기는 힘든 공단에서 그는 이루고 싶은 무언가를 소실했던 것일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해원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젠 그 천 밖으로 벗어날 차례였다. 해원은 마음 깊숙한 곳에 버려져 있던 열망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어둠속에선 한줄기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해원은 까만 천을 향해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올렸다. 밝은 빛이 수없이 새어나왔다.
“차해원씨. 할 말이 더 남아 있나요? 어느 곳이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충분히 있고 이번 사건에 대해선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실 얘기가 없다면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보시다시피 커피 마시는 중이라.”
서번트는 싱긋 웃으며 해원에게 말했다.
“이거 어쩌죠? 할 말이 남아있는데요.”
그의 무례함에도 해원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맞받아치며 대꾸했다.
“<취업지원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당신은 정부사람이니 그렇다고 동의는 못하겠지만 이 법은 취업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물론 당신도 알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남자의 자살 또한 이렇게 묻혀서는 안돼요. 그러니까 저는……”
해원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그게 제가 가진 신념이구요.”
해원은 그녀를 뒤덮고 있던 무기력증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곧 운영실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문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등은 신념을 회복한 자의 당당함이 서려있었다. 서번트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해원을 향한 확신이 비쳤다.
“왜 <취업지원규정>과 같은 법이 생겼다고 생각하나요? 취업난 해결을 위해서 생긴 거, 맞아요. 그런데 이 법이 계속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건 그 어느 국민이든 반대하며 나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차해원씨가 이 상황을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잘 나서 보세요.”
해원은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고개를 돌려 서번트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만 가 봐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 곧 점심시간도 끝날 텐데.”
그 말을 끝으로 해원은 운영실을 나섰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언니. 언니는 지금 행복해?”
해원의 뜬금없는 질문에 소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음……. 지금 행복하냐고 물은 거라면 아니라고 대답할래. 행복한 기분이 들진 않거든. 근데 공단에 들어오기 전과 지금에 대해 물은 거라면 조금은 행복하다고 말할게.”
소현은 그 시절을 회상하듯 되짚었다.
“그럼 이 일이 적성에 맞아?”
“아니. 그래도 병원일 보다는 덜 힘들어서.”
자조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서 쉬고 싶었는데. 소현이 통장에 고스란히 모아 둔 돈은 아직도 차곡차곡 이자가 쌓여가고 있었다. <취업지원규정>으로 쓰지도 못한 채 공단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함에 소현은 드러눕고 싶어졌다. 부모님의 권유에 입학한 간호학과에서의 시간은 그럭저럭 버틸 만 했었다. 그런데 막상 취업하고 임상에 나갔더니 소현은 미칠 것만 같았다. 쉴 틈 없는 빡빡한 일상과 몰아쳐오는 폭언들, 그리고 자꾸만 떠나가는 사람들.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 소현은 병원을 나섰다. 그래, 이만큼 일 했으니 관둬도 되겠지. 그 땐 이런 생각뿐이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힐링여행계획이나 짜자며 뒹굴 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법이 만들어지더니 소현은 공단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공단에 들어온 첫 날 서번트에게 항의하려 했지만 많은 이들이 내뱉는 소음에 그녀의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그 이후 딱히 이 상황에 불만을 표하고 다니지 않았다. 막상 일을 해 보니 그럭저럭 살 만 했기에.
“있잖아, 언니. 난 <취업지원규정>이 마음에 안 들어. 법이 멋대로 누군가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벗어나려고.”
해원의 덤덤한 말에 소현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소현의 눈엔 확고한 다짐으로 가득한 해원의 얼굴이 들어찼다.
“어떻게?”
공단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인지, <취업지원규정>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인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해원의 말이 잠자코 상황에 순응하고 있던 소현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정말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지금 뭔가 잘못됐다는 건 분명하잖아. 나는 여기의 이 상황에 가만히 있고 싶진 않아.”
공단에 들어오기 전, 이것은 부당하다며 당당히 말하고 오겠다는 다짐은 저 멀리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분위기에 괜히 주눅들어버렸다.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꽤나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 나도.”
“응?”
“도와줄게.”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상황을 타파하려 한다. 앞서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의 뒤를 따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보다 어린 이 동생을 믿고 싶어졌다. 소현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쉬고 싶다. 이번엔 충분히 열심히 일해 온 자신에게 선물을 줄 차례다.
자살사건이 발생했다는 게 무색할 만큼 일상의 시간은 순조롭게 흘렀다. 그리고 해원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아직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오전 일과가 끝날 때 쯤 관리자가 작업장으로 들어왔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자, 여러분. 주목해주세요! 오늘부터 3일 간 설문조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대상자분들이 <취업지원규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개선할 점 등을 정부에서 조사하기 위함이니 참여 바랍니다. 설문조사서는 식당입구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관리자는 작업장을 떠나갔다. 다른 이들의 물음 따윈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해원은 설문조사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어쩌면 일종의 여론조사로 정부는 이 조사를 토대로 법을 합리화시킬 것 같았다. 사회에 무관심하며 소극적인 이들의 참여율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도 이곳은 그들의 직장이다. 설마.
식당 앞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해원은 이 줄이 설문조사를 위한 줄이라고 생각하며 그들 뒤에 따라 섰다. 줄이 짧아질수록 해원의 눈에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쪽 구석으로 밀려난 작은 책상 위에는 종이들이 빼곡히 쌓여있었다. 해원은 줄에서 빠져나와 책상이 있는 구석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나. ‘<취업지원규정>에 대한 설문조사서 – 대상자용’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표시되어있지 않은 깨끗한 종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설문에 참여한 이들은 열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이것에 무관심했다.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를 품은 자신에 대해, 해원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해원은 설문조사서의 문항을 체크해 나갔다. 문항을 살피던 해원의 두 눈이 허공에서 멈췄다. 마지막 문항이었다.
‘<취업지원규정>이 존속되어야 한다. (찬성/반대)’
해원은 그것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저 한 줄짜리 문항은 위험하다. 분명 저 안에 담긴 의미는 어마어마할지도 모른다. 해원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헤매고 있는 사이 누군가 다가와 인기척을 냈다. 서번트였다.
“차해원씨는 고민이 많나 봐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거든요. 물론, 답은 정해져 있지만요.”
서번트는 펜을 들어 거침없이 체크해 나가는 해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반대라는 글자 위로 새겨진 브이표시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설문조사서를 완료함에 넣고 해원은 서번트를 응시하며 똑똑히 말했다.
“정부차원에서 조사한다더니 책상은 구석으로 밀려나있고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이건 뭐, 무인 조사함인가?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건가요, 이게?”
해원의 눈빛은 화로 가득했다.
“당연히 관리하는 사람은 있죠. 아마 식사 시간이라 식사하러 간 거 같네요.”
“그럼 다른 누군가가 교대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제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잠깐 동안이었지만 해원은 마음 편히 말하는 서번트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문조사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진짜 이유 말이에요.”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고 눈빛은 대답을 요구했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실과 진실, 둘 중에 차해원씨는 어떤 걸 고르겠어요?”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진실을 원해요.”
사실 따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 예상이 맞을 것이다. 해원은 확신했다.
“정부는 국민에게 자신들의 성과를 보여야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실행하려 합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관심은 최대의 적이에요. 자신들이 행하려는 것에 반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왔어요. 이 법이라고 다를 바 없지 않을까요.”
물음이 아닌 장담이었다. 그는 진실을 말했지만 이것은 사실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지 그가 입을 벌렸지만 그것은 곧 다물어졌다. 굳게 닫힌 입술이 다시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선 식사를 마쳤는지 담당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번트도 자신이 맡은 역할은 끝났다는 듯이 식당을 떠나갔다. 해원도 설문조사지를 한번 노려보고 자리를 떴다. 자신이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났다. 볼 일은 다른 곳에 있다.
우선은 무식한 방법으로 밀고나가기로 했다. 자신이 참여한 것처럼 소현과 작업장 동료들 그리고 점차 범위를 넓혀 공단의 모든 대상자들이 설문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긍정에서부터 시작하자고, 해원은 다짐했다.
“연주는 설문조사에 참여했어?”
작업장의 같은 팀 멤버인 연주를 향해 해원이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오늘도 일하기 싫다며 댓 발 내민 입술이 눈에 띄었다.
“아니요.”
구시렁대는 연주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연주야. 일하기 싫다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연주가 할 수 있는 정당한 행동으로.”
해원은 한껏 친절을 담아 말했다. 연주를 설득할 수 있도록.
“그런 거 해봤자 바뀌는 건 하나도 없는데 귀찮게 왜 해요.”
설문조사에 대해 관심 없다는 무심한 태도였다.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나 고생 한번 안 해본 이 철부지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지만 취업을 한다거나 대학에 진학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집에서 놀고 있다가 공단으로 왔다고 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은 없지만 공단에 들어오기 전처럼 놀고만 싶다는 게 소박한 꿈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그래서 연주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지루한 일 따위로 찬란한 스무 살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공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목표가 있다면 네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위해 나아가야지. 그게 설문조사처럼 사소한 것 일수도 있어.”
“아 씨. 아까 말했잖아요! 그런 거 한다고 뭐가 바뀐 적이 있어요? 귀찮게 왜 그래 진짜.”
“소연주! 너…….”
소연주 이게 진짜. 해원은 한 번 더 말을 건네려다 관두었다. 괜히 밀어붙인답시고 말을 꺼냈다가는 잔소리라며 꼰대다 뭐다 퉅툴거릴 것이 분명했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작업장을 훑어보았다. 일에 열중인 이들도 있었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딴 짓하는 이들도 있었다. 해원이 일하는 작업장만 해도 인원이 적지 않은데 커다란 공단 안의 모든 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져왔다. 사람들의 불신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찬바람을 쐬면 좀 나을까 싶어 해원은 작업장 밖으로 나섰다. 잠시 쉬러 가던 소현이 해원의 뒷모습을 보고 불러 세웠다. 해원의 지친 표정을 보던 소현은 함께 나가자며 이끌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해원에게 소현이 차가운 음료수를 건넸다.
“와, 날씨 좋다!”
음료수를 마시며 날씨에 감탄하던 소현을 해원은 잠자코 바라보았다.
“언니는 설문조사에 참여했어?”
“고민이 그거야?”
다 마신 음료수 캔을 휴지통으로 던지며 소현이 답했다. 골인이다. 저렇게 쉽게 풀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휴지통 속으로 쏙 들어간 캔을 보며 해원은 생각했다. 질문을 건네 놓고 멍하니 있는 해원을 소현이 툭툭 쳤다.
“난 당연히 참여했지. 널 도울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 봤는데 잘 떠오르지 않더라. 근데 마침 설문조사를 한다는 거야. 같은 팀에 몇 명 끌고 가서 설문조사 하라고 시켰는데 이건 한계가 있더라고.”
혼자라면 막막한 일도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든든하다. 그 누군가가, 소현이, 자신의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강제로 데려가서 시켰어? 언니답다. 난 누구 설득하려다 실패했거든. 괜히 미움만 산거 같아.”
“그래서 포기할거야? 아니지?”
해원은 싱긋 웃는 소현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가 더 필요하다. 신뢰는 가지 않지만 믿고 싶은 누군가가 떠올랐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증도 필요했다. 공단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생각을 바꾸려면 좀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해원은 또다시 서번트가 있는 운영실로 향했다. 이건 식당 앞에서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운영실 문을 열고 들어간 해원의 눈에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바쁜 모양이었다.
“할 말이 있어요.”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나갈 테다.
“지금은 바쁩니다.”
“시간이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에요.”
그럼에도 서번트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설문조사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요.”
“그때 말해줬을 텐데요. 차해원씨가 진실을 알려달라고 했잖습니까.”
서류위로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서번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 예상에 대한 확신이 필요해요. 왜 설문조사서에서 <취업지원규정>의 존속여부를 묻는 거죠? 정부가 법을 제정하고 시행했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건데.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명분이 없으니 대상자들을 이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말이에요.”
해원은 문제의 근본을 파고들어 날카롭게 찔렀다.
“그것뿐인가요?”
“설마……. 뭔가 더 있군요.”
이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속내가 두려워졌다. 찬반투표를 방불케 하는 마지막 문항 속에는 무언가 더 숨어있는 것이다. 그게 뭘까. 사람들의 무관심을 통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설문조사 참여율이 저조하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최종 참여율은 오십 퍼도 넘지 못할 거라네요. 그렇다고 무응답이 <취업지원규정>의 존속에 반대한다는 의사표현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거 같은데 말이죠.”
최악의 시나리오가 해원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들은 정부에서 막무가내로 통과시킨 법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사람들이다. 해원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최악일 줄은 몰랐다. 국민들을 위해 존재해야 할 이들이 역으로 국민을 이용할 생각인 거다. 지역 공단의 대상자들이 표본으로 뽑힌 셈이다. <취업지원규정>을 이용해 본 사람들이 법의 존속에 대해 찬성을 던진다면 자신들이 시행한 일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한다.
“정부가…… 우리를 이용할 셈이군요. 무응답을 찬성표로 바꿔 법을 정당화시키려고요!”
흥분한 해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서번트의 눈동자도 희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바뀌려고 하고 있었다.
“제 말이 맞죠? 그렇죠!”
“저에게 동의를 구하셔도 지침 상 뭐라고 대답해 드릴 수 없네요. 그렇지만 제가 차해원씨를 지지한다고 말한다면 대답이 될까요?”
흔들리던 그의 눈빛이 평정심을 되찾았다. 서로의 눈빛이 교차했다. 그가 자신을 지지한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지에 힘을 실어줘야겠지. 이제 해원도 그를 신뢰할 수 있다. 해원은 그의 눈에 자신의 눈을 한 번 더 맞춘 후 운영실을 나갔다. 든든한 아군이 생긴 기분이다.
삶이 빡빡한 사람들은 사회문제에 참여할 작은 틈조차 갖고 있지 못한다. 누군가의 문제제기는 그만의 문제일 뿐, 자신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인터넷상에서의 그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심지어는 인터넷이 토론의 장이 될 때도 있다. 공단 또한 현실사회와 다를 것 없다. 해원은 공단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을 이용하자고 생각했다. 익명성 뒤에서는 모든 일이든 할 수 있는 법이다.
제목 : 정부에게 속고 있는 멍청이들을 위한 글
안녕하세요, 대상자여러분. <취업지원규정>이 선포되고 우리가 이곳에서 일한지도 꽤 된 것 같네요. 그래서 지금 행복하십니까? 회사에서 잘려서, 취업을 준비하다가, 쉬고 있었는데 우리는 백수라는 이유로 지역공단으로 끌려왔습니다. 자발적으로 오셨다고요? 물론 이곳으로 걸어온 건 우리 스스로입니다. 하지만 통지서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여기에 있을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에 대해 강제로 권력을 행사한다는 건 국가 이념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취업지원규정>과 같은 법이 제정되었을까요? 설문조사도 똑같아요. 우리가 참여하지 않고 무응답으로 놔둔다면 뒷받침 없는 이 법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것을 이용할 것입니다. 무응답으로 놔둔 우리의 행동이 결국 모두를 옭아맬 것입니다. 권력자들이 함부로 우리를 이용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살사건처럼 쉽게 묻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늦은 밤 공단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불이 들어왔다. 누군가가 써 올린 글은 사회의 치부를 담고 있었다. 정우는 게시글을 한글자도 빼먹지 않고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글쓴이는 분명 해원일 것이다. 해원을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부당한 상황에 대해 항의하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그녀를 이용하자고. <취업지원규정>이 선포되기 전, 정부청사에서 일하고 있던 정우에게 지역공단 관리자이자 감시인 역할인 서번트로 파견될 것이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취업지원규정? 서번트?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정부에 소속된 공무원으로서 그에게 거부를 행사할 권리는 없었다. 그 이후로 <취업지원규정>에 관해 알아봤지만 알면 알수록 이 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권을 잡고 있는 권력자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 상황을 덮어버리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자신의 항의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그렇다면 자신보다는 법에 의해 대상자로 선정된 이가 나서는 것이 나을 것이다. 공단에 들어온 그는 대상자들을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그리고 차해원이 정우의 눈에 들어왔다.
서번트라는 자리 안에선 직접적으로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다행히도 해원은 그의 언질을 이해했다. 그래도 이번엔 서번트라는 지위를 이용할 수 있겠다. 정우는 자살사건 때처럼 홈페이지에서 글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원의 글에 조치를 취했다.
제 3 지역공단이 시끄러워졌다. 어젯밤 누군가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 설문조사와 관련한 정부의 수작을 낱낱이 밝혀 놓은 그 글에는 권력자들을 향한 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야, 야! 그 글 봤어? 대박.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어쩐지 그 법 마음에 안 들더라니. 꿍꿍이가 있었던 거잖아.”
“그러니까. 설문조사 그게 뭐라고 우리를 이용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분노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실을 알았는데 우리가 여기서 일해야 되냐?”
“어쨌든 설문조사 하나로 바뀔 수 있다는 거잖아. 난 설문먼저 하겠어.”
분노의 목소리는 활활 타올랐다. 스스로의 움직임이 현재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도 샘솟았다. 식당 구석으로 밀려났던 책상이 제 위치를 찾았다. 그 뒤로 대상자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담당 관리자의 얼빠진 표정도 볼 만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란스러웠던 공단의 분위기도 가라앉아갔다. 하지만 태풍의 눈도 그 안에선 고요할지라도 언제 비바람이 들이닥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해원은 수군거리는 작은 목소리들을 들으며 작업장으로 향했다. 심장은 미칠 듯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작업장은 공단 내의 그 어느 곳보다 조용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관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대상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운영실에서 급하게 조치를 취한 모양이다. 하지만 글은 삭제되지 않았다. 해원은 누군지 짐작하며 사풋 미소를 지었다.
해원은 작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소현을 만나 앞으로의 행동을 궁리하고 싶었다. 그래도 지금은 일에 집중하자. 너무 들뜰 필요는 없다.
“아, 아. 운영실에서 알립니다. 설문조사의 마감기한이 앞당겨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식당 앞의 책상에 구비되어 있는 설문지를 걷고 있으니 이 점 대상자여러분께서 숙지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설문조사의 마감기한이 오늘로 앞당겨졌음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공단 스피커를 통해 운영실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설문조사를 마감한다는 공지에 해원은 당황했다. 설문조사의 참여율을 높이면 될 줄 알았는데 위쪽에서도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 냈나보다. 작업장이 대상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태풍이 휘몰아칠 전조였다.
분노로 격양된 소리들이 들려왔다. 해원은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곧이어 작업장에 있는 관리자에게 항의하는 소리도 들렸다. 벌써 옆 작업장의 대상자들은 들고 일어선 것 같았다. 상황 판단을 위해 우선 작업장 밖으로 나갔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목이 사람들로 꽉 막혀 있었다. 운영실에서 들려온 공지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해원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설문조사를 위한 책상은 치워지고 없었다. 사실로 마주한 순간, 사람들의 분노가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공단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분노의 화살은 문제의 핵심을 향해 겨눠지고 있었다. 이제는 해원도 더 이상 이들을 막을 수 없다. 정부 청사로 향하자는 여론이 새어나왔다.
“해원아! 차해원!”
저 멀리서 들리는 소현의 목소리에 해원은 발걸음을 멈췄다. 곧이어 소현은 해원의 팔목을 잡고 급히 반대편으로 뛰었다. 군중 속에서 벗어나자 소현이 해원의 팔목을 놓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누가 급하게 널 찾고 있어. 네가 일하던 신문사 선배라더라. 어서 가봐.”
아마 조 선배일 것이다. 해원은 선배를 찾아 공단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르자 벽에 등을 기대며 서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조 선배다. 해원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향했다.
“선배!”
“해원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선배를 보자마자 신문사에서 일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또한 사회부 기자였지만 가장으로서 밥줄은 지켜야 한다며 불의에 맞서는 신념을 지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공단이 어수선해 보이네. 혹시 어제 누군가가 올린 글 때문이니?”
해원이 숨을 고르는 사이 선배는 속사포로 말을 걸어왔다.
“사실 그것 때문에 널 찾아왔어. 뭔가 아는 게 있나 싶어서. 지금 신문사도 난리야.”
“정말? 지금 운영실 쪽에서 강제로 설문조사를 중단시켰어. 정부청사로 가서 항의하자는 여론도 나왔고, 나도 지금 가야할 것 같아.”
다시 공단으로 들어가려는 해원을 조 선배가 급히 붙잡았다.
“잠깐만, 해원아. 이 상황을 기사화시키고 싶어. 혹시 더 아는 것 없니?”
선배의 말에 해원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삶과 타협했던 그의 얼굴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선배. 그 글 내가 썼어.”
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자료들을 건네며 해원이 밝혔다. 선배는 놀라지 않았다. 글쓴이가 해원일거라고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후배를 향한 자랑스러운 얼굴을 보이는 조 선배를 뒤로 하고 해원은 공단 안으로 달렸다. 모두가 함께 할 시간이다.
지역공단의 사람들은 정부청사로 향했다. 해원도 그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나비의 작은 날개 짓이 작은 바람을 일으켰고, 바람은 곧 폭풍이 되었다. 이제 폭풍은 잘못 쌓여진 권력의 탑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정부란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국민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시점
심각해진 취업난의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 제정·선포했던 <취업지원규정>법의 문제점이 우리 사회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면서 정부를 향한 비난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 서울의 한 시민은 “직업이 없다는 이유를 가지고 대상자로 구분지어 지역공단으로 몰아넣는 것은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발생한 국민을 향한 정권의 폭력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제 3 지역공단에서 발발한 시위는 정치에 무관심했던 국민들의 관심도 모으고 있다. <취업지원규정>법에 대해 대상자들을 이용하려고 한 점과 자살사건을 무마하려던 일들이 드러나면서 정권심판을 위한 시위도 시내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다.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분노에 대해 이제 정부는 취업난과 관련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국민들도 올바른 잣대로 정부를 심판해야한다. 이와 관련하여 돌아오는 수요일에 대통령의 담화가 있을 것이며 대상자들에 대한 보상 여부도 함께 논의될 전망이다.
― 차해원 기자 (sun_1@newsp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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