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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김경남_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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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30회 작성일 17-04-29 03:03

본문

<소설 부문>   

성명 : 김경남

성별: 남

연령: 1978년생

주소 : 경기도 화성시 반송동 쌍용예가아파트 449-1903

연락처 :010-4789-8798

 

 

 

 

비인가

(非 認 可)

 

 

 

 

 

- 1 -

 

 

삼백 평에 달하는 사무실, 맨 구석자리에 다용도실 개조 작업은 두어 시간 만에 끝났다. 아침부터 들이닥쳐 바지런을 떨던 건장한 인부 두 명은 문패를 다는 작업을 끝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망치소리, 전동드릴 소리가 사라진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몇 몇 사람들이 새롭게 생긴 방 앞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너나 할 것 없이 방 앞에 몰려들었다. 그 “방”이 궁금한 건 김성수도 마찬가지였다. 커피를 마시고 컵라면을 먹고, 종종 쪽잠을 청했던 다용도실, 그 협소한 공간이 새롭게 신설된 팀 사무실로 탄생한 순간이었다.

 

신사업 기획팀.

 

이미 풍문으로 들었던 그대로의 이름이지만, 막상 명패를 보니 낯설었다. 우선 명패 상단에 회사로고가 없다. 글꼴도 크기도 기존 명패와 확연히 구분이 지어졌다. 그러나 그걸 보고 늘상 거래하던 업체에서 잘못 제작한 거라 생각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총무과 누군가의 아이디어겠지만‘다름’은 그 시작부터가 옹졸해보였다.

 

이름은 뭐 저렇게 그럴싸하게 지었네.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만,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굳게 닫힌 방문을 여는 이도 없었다. 사람들은 잠시 동안 문패만 올려다보고 썰물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전 11시를 조금 시간이었다. 이번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사무실 중앙에 있는 게시판이다. 김성수는 한 곳을 바로 보는 수십의 까만 뒤통수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저리도 크고 선명하게 인쇄돼 만천하에 공개된 적이 있었던가.

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일동 침묵했고, 그는 가장 먼저 그 침묵의 연막에서 벗어나 자리로 돌아왔다. 오래됐지만 깨끗한 머그잔과 칫솔을 빼곤 그의 소유는 없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그것들을 휴지통에 넣었다. 그는 의도치 않은 딸그락,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로비로 나가는 길에 그는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모두 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그것이 다행한 것인지 아닌지 선뜻 파악되지 않았다.

초저녁, 바깥 공기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긴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시작됐다는 뉴스가 그의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이 마흔셋에 퇴출 통보, 나름 성실히 다녔던 직장이었으니 제법 비애를 느낄 법했지만 희한하게도 그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철로 걸어가면서 그는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생각해보았다. 별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가 정확히 예측, 아니 확신할 수 있는 거라곤 집에 가면 아내와 초등학생 딸이 반드시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몇 달 째 외출을 하지 않았다. 장도 마트의 배송서비스를 이용했다. 아내는 그 사건이 있은 후로 더욱 기진한 모습을 보여 왔다. ‘중등도의 우울병 에피소드’ 그건 그가 아내를 거의 반강제로 데려간 병원에서 얻은 병명이었고, 아내는 그걸 핑계 삼아 전보다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끈질긴 이혼 요구를 결국 받아들였지만 그녀의 그 대단하다는 로맨스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내는 그가 이혼 승낙을 너무 늦게 한 탓에 자신의 연인이 참다못해 떠난 거라고 그에게 악다구니를 냈다. 그런 아내의 태도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내가 측은하기도 했다. 점점 파리해져가는 팔과 다리, 핏기 없이 하얗게 변해가는 얼굴의 아내는 영락없는 집 귀신이었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 저 여자가 저렇게 되었을까. 만일 그 책임을 물어야한다면 절반 정도는 자신에게 있음을 그는 부인할 수 없었다.

결혼 전 그는 아내가 자신의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여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을 믿었다. 또한 좋은 환경에서 자란 그녀와 살면 자신도 그에 보조를 맞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질 높은 삶을 누릴 거라 여겼다. 실제로 결혼 초기엔 넘치는 풍요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좋지 않은 선택을 했음을 인정해야했다. 결혼 후 그가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자신의 무능이었다. 그는 그 무능을 깨닫는 순간 왜 총각시절엔 이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걸 알지 못했는지 후회했다.

만나는 남자가 있으니 이혼해 달라는 아내의 얼굴 표정은 무구했다. 지금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지 조차 모르는 듯 해보였다. 그가 남자를 직접 만나보겠다고 하자 아내는 그건 안 된다며, 차라리 날 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히스테리의 또 다른 분출일 뿐 사실이 아닐 거라고 단정 지었다.

다음 날 퇴근 후 그는 확 바뀐 집안 구조를 확인했다. 아내의 짐은 모두 안방으로, 그의 짐은 작은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일이 그 정도 되니 그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그는 결혼 팔년이라는 세월동안 아파트 담보 대출, 회사를 다니면서 창업한 프랜차이즈 치킨 집 폐업으로 생긴 빚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채무를 남겼다. 소득이 있다면 비교적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딸 뿐이었다. 그가 빚을 내 아파트를 사고 치킨 집을 연 건 부자 장인을 믿고 저지른 일이었다. 허나 장인의 사업이 몰락하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단순히 가계 빚을 스스로 갚아 나가야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풍족한 생활에 익숙한 아내의 혼란이 문제였다. 당시 그는 아내의 히스테리가 일시적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의 월급으론 아내의 소비를 도저히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그가 아무리 말려 봐도 아내는 멈추지 않았다. 아내는 그 모르게 계속해서 빚을 내고 있었고, 그가 확인했을 때 이미 빚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되었다. 처녀시절 아내의 아름답고 구김 없는 맑은 이미지를 만든 원천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는 것을.

사채빚 독촉에 결국 그는 아파트를 팔아, 일부 빚을 정리하고 평수가 훨씬 작은 현재의 서민형 아파트에 전세를 얻었다. 그리고 이 아파트에 사는 동안 아내는 외도했다. 결론은 언제나 간단했다. 믿었던 장인의 회사는 결국 회생되지 못했고 그는 사년 째 부장 승급에서 떨어져 결국 퇴출 위기까지 내몰렸으며 처녀시절 생기 넘치던 아내는 집 귀신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의 아내는 소위 시련을 당하고 이혼요구를 철회했다. 왜 이혼을 안 해? 해준다니까? 이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문제인거야? 화가 치밀어 오른 그의 말에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후 일곱 시 삼십분.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대로 집엔 아내와 딸이 잠들어 있었다. 아내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때나 잠들고 깨길 반복했다. 정신과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을 때 의사는 아내에게 어떤 순간 가장 평온하냐고 물었고 아내는 말하지 않을 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후로 그는 아내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할 말이 있으면 아내는 그의 컴퓨터 모니터에 포스트잇을 부쳐놓았다. 보통 카드 값과 공납금 액수를 적어 놓거나, 생활비가 얼마가 필요하니 입금해달라는 내용이 메모의 전부였다. 그가 아내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건 일요일 밤에 방영되는 슬랩스틱 코미디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다. 서로 때리고 넘어지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개그맨들을 보면서 아내는 발작적으로 웃어댔다. 아내는 그를 위해 밥을 짓지 않았지만 집안 청소 하나는 말끔하게 했다. 아니 말끔한 정도가 아니다. 집안엔 늘 진한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씻지도 않고 처음 보는 1인용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선 아직 화공 냄새가 났다. 공복이지만 배가 고플 리 없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내가 늘 이야기하던 쥐꼬리 같은 월급마저 없어진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돈을 갚아야할지 막막했다. 신사업기획팀. 이름은 꽤나 거창했다. 그는 생각했다. 당연히 신사업은 없을 것이다. 고로 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시쳇말로 하늘도 땅도, 모든 사람들도 아는 아주 명백한 사실이었다.

 

 

- 2 -

신사업기획팀엔 총 다섯이 발령됐지만 다음 날 출근자는 그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다. 정년이 얼마 안남은 최 부장과 이 부장은 출근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빨리 나왔다. 책상과 걸상만이 일렬로 늘어져 있는 사무실은 황량하다 못해 삭막할 정도였다. 뒤늦게 출근한 김 대리, 박 차장은 한 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침묵을 깬 건 박 차장이었다. 아, 컴퓨터! 박 차장은 관리팀에 전화를 넣었고 컴퓨터는 이미 전산부에 반납처리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말에 셋은 일단 방 밖을 나갔다. 복도를 걸을 때 그는 세 명의 후배와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는 허투루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단지 인사만 했고 그들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김 대리, 박 차장도 그와 사정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왔다.

“이런 제길, 창문도 없네?”

김 대리가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창문이 없었다. 방문을 반쯤 열어두면 한결 나아질 거란 걸 모르는 이 없었다. 그러나 그도 김 대리도 박 차장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수인계를 해 준적이 없기 때문에, 전화가 울릴지도 모른다. 전화가 오면 그는 최대한 태연하게 응대하리라 마음먹는다. 마음속엔 벌써 수화기를 들고 ‘네 신사업 기획팀입니다.’라고 말할 것을 다짐도 해둔다. 그러나 딱 한 대 놓인 전화는 오전 내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김 대리는 잠에 빠져 있었고 박 차장은 개인용 노트북에 몰두하고 있었다.

“박 차장님. 뭐 하세요?”

“신사업기획팀이니 신사업을 찾아야지.”

박 차장은 그를 향해 싱긋 웃으며 취업 사이트를 가리킨다. 생각해보면 박 차장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신사업기획팀에 주요 소관업무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서둘러 이 방문을 나가는 것이다. 누가 먼저 나가나. 내기라도 해야 하나.

“점심 안 드세요?”

그의 물음에 박 차장은 가방에서 큼지막한 도시락 가방을 꺼냈다.

“내 도시락 같이 먹자고, 이봐 김 대리! 자네도 밥 먹어야지.”

박 차장의 말에 어느새 잠에서 깼는지 김 대리도 못이기는 척 다가왔다. 5인분을 준비했는데, 이거 많이 남겠는 걸? 박 차장은 진심으로 그것이 고민된다는 투로 말했고, 그 모습에 김 대리와 그는 소리 없이 웃어보였다.

“이제 저흰 뭘 하죠? 하다못해 인수인계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수인계는 벌써 자네 컴퓨터를 통해 다 했을 거야. 자네가 없을 때 구석구석 뒤져 복사본을 만들었을 테니까.”

박 차장은 좋은 안내자역할을 했다. 빨리 다른 취직자리를 찾던지, 모아둔 돈이 있으면 사업을 해야 한다고. 행여 재충전이다 뭐다해서 여행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도 했다. 박 차장은 동종 대기업 부장에서 명퇴 후 일 년 이상을 쉬다 직급을 낮춰 차장으로 회사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차장님 이번엔 다른 회사 과장으로 가시면 되겠네요?”

김 대리의 객쩍은 농에 박 차장은 대꾸 없이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나저나 우리가 뭐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저는 화장실 가는 걸 참고 있는 걸까요? 참내 쪽팔려서 원. 내일 선풍기랑 요강도 좀 갖다놔야겠네요.”

그런 식으로 김 대리는 시답잖은 말들을 계속 했고 박 차장과 그는 그 시답잖은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그냥 퇴근해버리자는 김 대리의 말에 박 차장은 믿는 구석이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몇 달 전부터 시행한 근태관리규정엔 해당 임원의 승인 없이는 무단조퇴를 할 수 없으며, 만일 이를 어길 경우 회사의 어떤 조치에도 응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었다. 이미 그들 셋 아니 모든 사람들이 그 각서에 사인을 해놓았다.

“월급은 잔업수당 제외하고 그대로잖아. 달라진 건 없다고. 느긋하게 다른 일자리를 구해보라고 자네들도.”

“역시 박 차장님은 최 과장님이랑 다르네요. 명퇴 유경험자 스킬 이거 만만히 볼게 아닌데요?”

박 차장의 사뭇 진지한 훈계를 김 대리는 여전히 농담조로 맞받아쳤다. 그런 장난기는 김 대리의 매력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잘 생기고, 농담도 잘하는 김 대리를 좋아했다. 김 대리가 이곳으로 발령 나게 될 줄은 아마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김 대리는 입사는 그보다 느렸지만 나이로는 동갑이었다. 신사업기획팀에서의 며칠이 지나자 그 둘은 자연스럽게 말을 트게 되었고 박 차장과는 형 동생이라 부르기로 서로 합의를 봤다. 그제야 박 차장과 김 대리는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차장은 꼿꼿한 성격 탓에 담당 이사와 크게 한바탕 한 것이 화근이라고 했다. 김 대리의 경우는 조금 특이 했다. 담당 부장이 좋아하는 여직원이 김 대리를 더 좋아하는 걸 질투해서 이 지경이 된 거라 푸념했다.

“자네는 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

그의 차례가 되었는지 박 차장이 그렇게 물었지만 그는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글쎄요. 저는 뭐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없긴 왜 없겠어? 솔직히 우리 회사가 우리 월급 준다고 망하는 회사야? 그저 윗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을 보내버리려고 한 것 밖에 더 되겠어?”

김 대리의 말은 분명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담 과연 나는 누구한테 밉보였을까? 하고 그는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잘못도 그렇다고 칭찬받을 만한 일도.

일주일이 지나자 신사업기획팀의 사무실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아무리 오지라도 사람이 살면 무언가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노트북, 작은 화분과 선풍기, 커피메이커, 누가 그렸는지 모를 그림액자도 생겼다. 모두 각자의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이다. 심지어 김 대리는 정말로 요강 하나를 가져다 두었다. 아직 개선되지 않은 건 박 차장이 총무과에 강력히 주장한 창문 공사뿐이었다.

정리 된 건 사무실 환경만이 아니다. 각자의 할 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갔다. 열심히 이력서를 쓰던 박 차장은 몇 군데 회사에서 콜을 받고 있었고, 본가에서 원조를 받아 사업에 뛰어들기로 한 김 대리는 어떤 사업이 좋을 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가. 그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때의 파장을 먼저 생각해봤다. 그러나 알려봤자 그 어떤 반전도 없을 거란 결론은 너무도 쉽게 내려졌다.

그는 책상머리에 앉아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해버려서인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늘 염두 해두었던 자살이 어쩌면 이 난국을 타계할 가장 빠른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죽게 된다면 이십 년 이상 붓고 있는 생명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것이고, 아내는 그 돈으로 일단 일부 빚을 갚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 남자와 살게 될지 모른다. 또 그렇게 된다면 아내는 건강을 되찾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될지 모른다.

허나 죽기가 그렇게 쉬운가. 자신이 죽었을 때 상황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우선 아내와 딸이 가장 먼저 자신의 시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엔 아들의 부음에 헐레벌떡 달려올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기함하게 될 것이다. 그랬다. 자살 후에 일어날 일련의 일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두 다리 두 팔이 없는 사람들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웃음 짓는 모습은 TV에서 종종 볼 수 있다. 프로그램은 시청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걸 보며 희망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그는 생각했다.

김 대리와 박 차장이 각자 새로운 희망을 생각하며 일을 추진할 때 그는 사망보험금을 많이 타낼 수 있는 방법, 고통 없이 죽는 방법 따위를 검색하거나 박 차장처럼 취업사이트를 보며 시간을 죽였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엔 자신은 결코 스스로 죽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는 ‘나는 행복했던가.’ 라는 거대한 화두를 던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면 그나마 들던 시답잖은 생각마저 사라지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에 강하게 마취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취가 잠시 풀릴 때면 눈앞에 산재한 문제들과 직면했다. 그건 분명 지독한 것이었다. 그는 차라리 영원히 마취에서 깨지 않기를 바랐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양치하고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그 머리를 드라이로 말리면 제법 말쑥한 모습이 된다. 그러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는다. 아니 바라보되 반쯤 눈을 감고 흐릿하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지하철 한 구석에 앉아 신사업기획팀으로 향한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럴 때면 가끔씩 들뜬 기분이 된다는 것이다. 어쩔 땐 가슴이 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유 없는 설렘은 언제나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마음을 다잡고 취업사이트를 뒤적일 때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파란 액정에는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몇 달 전 사직한 입사 동기 김이었다. 수화기 넘어 김은 그의 소식을 들었다며 짐짓 위로의 말을 건네며 안 바쁘면 한번 만나자고 했다. 그 순간 그는 몇 달 전 회식자리가 떠올렸다. 우연찮게 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에게 그는 김은 지금 번화가에서 고깃집을 하고 있으며 한 번도 찾지 않았음에도 가끔 들리는 단골인데 장사가 엄청 잘된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사람들은 그래, 월급쟁이보다 장사가 낫다. 오히려 회사를 나간 게 이득이다. 역시 둘의 우정은 피보다 진하다. 라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는 김이 회사를 떠난 후론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니 바쁘다는 핑계로 여러 번 김의 전화를 묵살하기까지 했다. 같은 캐릭터가 둘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돼 그 중 한 명을 부산 지사로 발령 낼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자 김이 먼저 사표를 썼다. 그로선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임에도 그는 김에게 어떤 호의의 표현도 하지 않았다.

지하철에 나와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자신의 가게가 지하철 인근 거대 유흥가에 있다는 김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가게는 허름했다. 김은 목장갑을 끼고 초벌구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리 외진 데 장사가 되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매캐한 숯불 냄새가 가게에 진동했지만 손님은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초벌구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손님 하나 없는데 뭘 그리 바빠? 그가 물었지만 김은 잠깐 자리에 앉아 기다리라며 계속해서 숯불을 째려보았다. 그 숯불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김의 얼굴은 그에겐 분명 낯선 것이었다. 몇 달 전만해도 애인에게 선물 받은 명품 넥타이를 자랑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돌연 김의 애인은 어떻게 되었으며 와이프와의 관계는 어떤지 궁금해졌다. 또 가게 수익구조도 궁금했다. 사실 그는 이곳에 오는 내내 김을 만나 무슨 얘기를 할 지 고민했었다. 하지만 막상 김을 보니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아진 것이다. 그때 손님 몇 명이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했다. 어서 오세요. 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말투에 그는 절로 웃음이 났다. 그는 목장갑을 벗고 있는 김에게 손짓을 해보이며, 손님 테이블에 물 한 병과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삼겹살과 소주 주문을 받아왔다. 그때부터 줄줄이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그는 종업원 노릇을 했다.

“와이프가 몸이 아파 조금 늦는데, 조금만 도와주면 금방 올 거야.”

김은 그렇게 말하며 여기저기에서 주문을 받아오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는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김의 아내를 떠올렸다. 외모 하나는 정말 수준급이었다. 그는 도무지 그 여자가 이 허름한 가게에서 생고기를 들고 나르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손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밀려들어왔고, 그는 열심히 고기와 술병을 날랐다. 그러나 바통을 터치해 줄 김의 아내는 시간이 꽤 흘러도 오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 그는 김에게 재수 씨 많이 아픈 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김은 대꾸 없이 불판을 들고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손님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마침내 김과 그는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이건 뭐 제대로 안타치고 있구나? 근데 와이프는 어떻게 된 거야?”

“안 오려나 봐. 매일은 안 오고 가끔씩 와.”

“그럼 매일 혼자서 서빙하고 불판 닦고 설거지 하고 계산까지 네가 혼자 다하는 거야?

“미친놈 뭔 말을 그렇게 늘여서 해. 그것 때문에 부장이 네 욕을 얼마나 해댔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냐? 아무튼 뭐든지 상황은 달라지게 마련이니까. 가만히 있어.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횡령을 한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신사업기획팀, 이름 하나는 정말 멋지네?”

김은 그의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날 밤 김과 그는 가게 셔터를 내리고 늦도록 술을 마셨다. 김은 김대로 그는 그대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서로의 말만 토해내고 있었다.

“야, 이거 말이야. 아무리 잘나가는 고깃집 사장님이라고 말해도 여자들한테 씨알도 안 먹히더라. 그래, 이참에 신사업기획팀장으로 내 명함 하나 파서 주라. 총무과 이 과장한테 내가 좀 부탁한다고 하면 해줄 거야. 신사업기획팀장이라…폼 좀 나겠는데?”

취기에 간신히 일어서 돌아가는 그에게 김은 그렇게 작별 인사를 대신했고 그는 곧 파서 보내주마. 하며 길을 나섰다.

다음 날 아침 박 차장은 출근하지 않았다. 지난 번 면접 본데가 잘 된 모양이라고 일러주는 김 대리는 조만간 자신도 여기서 나가게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신촌 어딘가에 괜찮은 커피숍을 인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 풍파를 견뎌내면 다시 제자리 찾아갈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쪽팔려서 어디 생활이라도 하겠어?”

숙취가 남아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김 대리의 그 말에 돌연 부아가 치밀어 올라 한껏 쏘아붙였다.

“박 차장이야 영어, 중국어 다 잘하고 너는 집에서 사업자금 대주잖아. 근데 나는 빚만 잔뜩 있어. 그것도 어마어마한 빚이. 여기서 내가 뭘 어떻게 할까? 씨팔 진짜.”

“왜 아침부터 성질이야? 아무튼 돈 좀 융통할 데 없어? 아주 좋은 투자 정보가 있는 데 말이야. 삼천만 준비해봐. 못가도 열 배 이상은 갈 주식이야. 몇 달만 참아보라고. 나도 인수자금 쓰고 남은 거 여기에 다 털어 넣었어.”

주식이라…그는 솔깃했다. 아니 열 배 라는 말이 끌렸다. 김 대리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는 지금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감생심 은행권은 꿈도 못 꾸고 다음 날 그는 사채로 삼천만원을 빌렸다. 그리고 곧장 김 대리가 알려준 주식을 모조리 사들였다. 놀랍게도 김 대리의 말대로 주가는 연일 신고가를 갱신해 나갔고 그의 계좌에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열배라면 삼억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 목표가는 욕심을 줄여 이억으로 하자. 그 돈이면 어느 정도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가 상승과 함께 그도 차츰 회복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넒은 사무실에 그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사무실은 고요했다. 아무도 그를 찾지도 말을 건네주지도 않았지만 그는 심심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밖에도 드나들고 점심도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사람들을 만나도 먼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주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목표했던 이억이 생긴다. 그래, 조금 만 조금만 더.

그러나 그날 아침 그의 희망적인 계획은 일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전 대표이사의 횡령으로 인해 거래정지가 되었으며, 상장폐지 실질심사대상으로 지정되었다는 공시가 뜬 것이다. 그는 김 대리에게 황급히 전화를 넣었다. 김 대리는 아직도 가지고 있었느냐며 오히려 그에게 성을 냈다.

“어떻게 된 거야? 열 배라면서?”

“그건 정확한 게 아니지 이 사람아. 뭔 놈의 욕심을 그렇게 부려. 적당히 먹고 나와야지.”

그랬다. 순식간에 다시 원래의 상황으로 돌아왔다. 아니 결국 상장폐지 된다면 채무 삼천만 원이 더 추가되는 것이다.

그는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맥이 풀리긴 했지만 화가 치밀어 오르진 않았다. 아직까진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퇴근 무렵, 김 대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조금 알아보니 갑작스런 일이라서 그런지 피해자가 많다. 소액 주주 모임을 만드는 것 같은데 거기에 주식을 위임해보라는 말을 그에게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엔 소액주주모임 카페가 마련되어있었다.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카페에 가입했다. 카페는 회사를 비난하는 글, 하소연 하는 글로 도배되어있었다. 할 일 없는 그는 자신의 온갖 증권 지식을 동원해 많은 글들을 올렸다. 꽤나 전문성이 있어 보이는 그의 글에 사람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거기에 더욱 고무되어 위기에서 벗어날 복안을 구상하는 글을 열 있게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임시운영진에게 그를 소액주주대표로 선임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임시운영진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어느새 그는 카페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글에 사람들은 크게 동요 했다. 존경한다, 믿고 따르겠다. 라는 댓글들을 보며 그는 작은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마치 대통령 취임선언을 하 듯 자신이 신상과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중견기업 00전자 신사업기획팀의 과장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역시, 하며 더욱 더 그를 추종했다. 반드시 돈을 찾아야하는 사연을 담은 수십 통의 메일이 그에게 날아왔다. 어느새 주식시장이라는 제로섬게임의 게이머들은 한 마음 한뜻이 되어 그를 구원자로 떠받들고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바빠졌다. 법률 책자와 인터넷을 뒤적이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이 난국을 타계할 방안들에 대해 글을 올려야했고, 운영진을 결성해 주식을 위임받고 대대적인 탄원서 작업에도 돌입했다. 또 온라인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는 운영진들을 필두로 한 오프라인 주주모임을 결성하고 그 첫 만남을 가졌다. 일명 개미들이 마침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연령대는 이십에서 육십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걔 중엔 여자들도 꽤 끼어있었는데 한 명의 여자가 그에 눈에 띄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의 여자는 시종일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 즈음 되었을까.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오래전 아내를 처음 봤을 때처럼 몸의 변화를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온몸이 뜨거워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날 그는 소액주주들을 이끌고 회사를 찾아가 한바탕 항의를 한 후 가까운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다. 술자리의 화두는 단연 그의 활약상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기분 좋게 술잔을 연신 비웠다. 사람들과 헤어진 후에도 그는 그 쾌감을 쉽게 잊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예정에 없던 주주모임을 매일 같이 한다는 공지를 남겼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며칠 남지 않았으며, 고로 우리의 결집된 힘을 회사와 당국에 보여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각자의 소중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며칠간 협조를 부탁한다. 일정이 끝나면 저녁에 술과 안주를 대접하겠다는 그의 공지는 예상대로 즉각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매일 같이 모이는데도 적지 않은 인원이 그와 함께 했다. 투자한 회사에 진행상황을 묻고 항의를 하고, 거래소를 찾아가 선처 해줄 것을 읍소하는 것이 일정의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술자리를 가졌다. 그는 공지 글을 쓰면서 내심 그 여자가 다시 나와 주길 기대했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대화에 참여하는 걸 꺼려하긴 했지만 그 여자는 매일 같이 현장에 나타나주었다. 그는 그 여자를 보면 볼수록 요상한 상상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그걸 드러내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날 밤, 모임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는 여자와 마주쳤다. 그가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며 짐짓 태연한척 지나치려할 때 여자가 그의 앞을 막고 섰다.

“대표님, 술 한 잔 더 하실래요?”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여자의 말에 그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물론 거부하지 않고 가까운 주점으로 여자를 안내했다.

“근데 대표님. 제가 아직 주식 위임을 하지 못했어요. 인감을 제 남편이 가지고 있거든요. 어디다 숨겨놓은 것 같은데… 암튼 요새 찾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 근데 성함이?”

“나이는 서른둘이고요, 이름은 위임장으로 확인하세요.”

방긋 웃으며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그리고 몇 순배 술잔이 돌아갔을 때 여자도 그도 완전히 취해버리고 말았다. 주점을 나온 그들은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목적지도 없이 그들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그 어떤 소통도 없이 불 켜진 모텔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엉겼다. 그는 쉬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남성은 더욱 강해졌다. 긴 행위가 끝나고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가 잠든 사이, 여자는 그곳을 떠났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그는 지난밤을 떠올렸다. 비록 결혼 생활이 늘 뻐걱대긴 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술에 억병으로 취했다는 것과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다는 점 등 스스로를 방어할 기제들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는 그가 무슨 짓을 하든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보다 향후 여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지가 더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날부로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여자의 이름도, 연락처도 몰랐다. 그는 체리공주라는 여자의 카페 별명을 클릭해 이메일과 쪽지를 여러 번 보냈지만 여자는 읽지 않았으며 카페 회원들에게 수소문해도 여자의 신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3 -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그가 투자한 회사는 모든 소액주주의 바람대로 상장폐지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재거래 공시가 뜨자마자 사람들은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날 밤, 그를 비롯한 소액주주들은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술자리의 화두는 단연 그의 공로였다.

“내 나이는 많지만 당신을 이제 형님으로 모실 생각이오.”

노신사 한 명이 그렇게 깃발을 뽑아들자 모두다 형님, 아우님하며 그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결국 해낸 것이다. 그는 깊은 감격에 젖어들었다. 그에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자신의 이 멋진 모습을 여자가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거래 재개 첫날부터 주가는 다시 상한가 행진을 계속해나갔고 그는 당초 목표가인 이억 원의 수익을 거두게 되었다. 김 대리는 그의 뚝심에 탄복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형님 아우하며 하루가 멀게 전화를 했던 사람들의 연락이 뚝 끊기고 카페도 금세 썰렁해졌다. 그 역시 이렇게 되리란 걸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들이 괘씸하기도 했다.

신사업기획팀, 몇 달 째 혼자 머물고 있어도 회사에서는 별 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월급도 꼬박꼬박 통장에 꽂혔다. 그는 하릴 없이 방안을 둘러보다 박 차장이 집에서 가져온 그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안 되는 한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그림이었다. 화가는 저 그림을 무슨 생각으로 그렸을까. 잡다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다시 떠돌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웠다. 그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카페에 들어가 글을 써보았지만 전처럼 관심을 끌진 못했다. 그랬다. 그는 다시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이억 원의 현금이 그의 수중에 들어온 후에도 그는 사표를 쓰지도 채무를 변제하지도 않았다. 대신 상장폐지실질심사가 확정된 몇 종목의 주식을 장외 거래를 통해 대량 구입했다. 그리고 카페를 개설하고 다시 선봉에 섰다.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그는 전 보다 더 열성적으로 그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는 달리 그 기업들은 다시 회생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몇 달 만에 많은 돈을 잃게 되었다.

결과가 좋지 않자 그를 그렇게 믿고 따르던 주주들은 그에게 쌍욕을 퍼부어댔다. 당신이 그렇게 나대지만 않았어도, 가뜩이나 미운 놈으로 찍혔는데 청와대, 거래소의 심기를 건드리는 탄원서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둥 만나면 죽이겠다는 둥의 메일과 쪽지를 받았다. 그는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이 참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저 기억나시죠? 하며 말을 건네는 사람을 그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회생된 회사의 소액주주였다.

“이거 연락드려야하나 고민하다가 어쨌든 알게 되었으니 말해드리는 건데요. 그 여자 기억 하시죠? 왜 있잖아요. 카페에서 가장 젊은 여자. 얼굴 하얗고 조금 멍청하게 생긴 여자 말이에요.”

까맣게 잊고 있던 여자의 소식에 그는 일순 긴장했다.

“그 여자 어제 죽었어요. 주식도 위임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주주인지도 모르겠고, 근데 매일 모임 때마다 나오는 걸 보니 주주는 맞는 것 같고.”

“그거 어디서 들었어?”

“듣긴요. 이미 그때 사람들 남남 된지 오래인데요. 세상 정말 좁더라고요. 글쎄 그 여자가 저희 회사사람 와이프더라고요. 영정사진 보고 알았죠. 그때 형님이 그 여자 좀 찾았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연락드리는 거예요. 자살을 했다는데 뭐 이유야 알 수 없죠. 상장폐지도 되지 않았고, 뭐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그는 옷장에서 검정색 양복을 떼어 입고 길을 나섰다. 분명 여자의 갑작스러운 부음은 그로 하여금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아직 꽃을 다 피우지 못한 채 죽어간 영혼의 현장은 어수선하다. 죽음의 시선이 머무는 장소에서, 여자의 영정을 말없이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조금 눈물이 났다. 허나 그는 그 눈물의 전거를 알 수 없었다. 문상을 하고 돌아서자마자 눈물은 멈춰버렸다. 그는 차라리 흘리지 말아야할 눈물이었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남편으로 보이는 상주와 맞절을 하고 나니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마흔 정도 되었을까.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남자는 다행스럽게도 그에게 여자와 어떤 관계인지 묻지 않았다.

그는 육개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워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여자의 주변인이었을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두 여자의 삶에 조금이나마 관계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새삼 무연함에 대해 생각했다. 또 자신이 과연 이 슬픔을 공유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슬픔을 공유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그는 여자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아니 최명희라는 이름조차 이곳에 와서 알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죽음도, 이 찰나간의 비애도 조만간 완전히 사라져 버릴 거라고. 그리고 저 많은 사람들도 자신과 많이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날 밤 그는 술을 마셨다. 아니, 거의 목구멍에 퍼부었다. 그는 집으로 가지 않고 신사업기획팀 사무실에 들어섰다. 어둑한 공간에는 그 말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벽에 걸린 그림을 쳐다보았다. 묘한 표정의 그림 속 주인공이 그를 쏘아보고 있다. 그는 몸을 틀어 전신 거울 앞에 천천히 다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울긋불긋한 얼굴에 주름이 잔뜩 그려져 있다. 이번엔 요강 앞으로 다가간다. 아무도 거기에 오줌을 누지 않았다. 그는 지퍼를 내리고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오줌줄기는 잘 흐르지 않은 눈물처럼 찔끔찔끔 요강에 떨어져 내린다. 그는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몇몇 사람들이 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그 중 하나를 클릭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주인장. 당신이나 나나 소액주주일 뿐이오. 당신이 그 전 회사를 마치 당신이 노력해서 살려낸 거라 착각하는 것 같아서 한 마디 합니다. 그 회사가 회생한 건 당신과 전혀 무관 했을 겁니다. 어차피 큰 틀은 정해진 수순대로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우리의 대장이 아니에요. 너무도 명백히 자신들의 귀찮아서 안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임시 반장이랄까? 그런 것이겠죠.

그는 그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승리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는 명확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돌연 많은 사람들의 갈채에 들떴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 순간 그는 예전에 살던 아파트 발코니에서 보았던 까치 한 마리를 떠올렸다. 무더운 여름, 상처 입은 까치가 날지 못하고 뜨거운 아스팔트위에서 기고 있었다. 까치는 열심히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날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거리를 걷는 행인들 누구도 그 까치를 구하지 않았다. 물론 그도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 까치는 뜨거운 더위와는 무관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더위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까치는 잠무리가 그리웠으리라… 어쩌면 까치는 오작교의 사랑으로 나열되지 못한 자신의 틀어진 삶을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까치는 어떻게 됐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우당탕,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인부 몇 명이 창문을 뚫고 있었다. 박 차장이 부탁했던 창문 공사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이 아저씨 지금 일어났네? 그렇게 깨워도 안 일어나더니만.”

인부 한명의 말에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어떤 꿈도 꾸지 않고 긴 잠을 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몸이 한결 가뿐해진 느낌이 들었다.

창문 공사는 거의 막바지인 모양이었다. 시원하게 터진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왔다. 그는 망치질을 하는 인부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 중 한명이 위태롭게 창가에 붙어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그때였다. 한 인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망치에 맞았는지 인부 한명의 손에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인부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지만 그는 희한하게도 그 모습이 조금도 안쓰럽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위험하게 일을 하니 다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신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 것 같았다. 다친 인부를 나머지 둘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 둘의 표정에서는 어떤 슬픔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 그뿐이었다. 그는 그 모습을 뒤로하고 천천히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로변에는 차가운 칼바람이 불어왔다. 늦겨울 해는 벌써 서쪽으로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그랬다. 벌써 겨울의 종장이었다. 그는 멀어져가는 사옥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 오래전 김이 부탁한 명함을 총무과 이 과장에게 말하지 못한 게 생각났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중요한 다른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 집으로 돌아가자. 집에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하자.

돌연 그는 집으로 가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근거 없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다시 할 일이,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삶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은 삶에서 무슨 기대를 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분명 살아 있고, 여전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궤도를 이탈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또 다시 가슴이 이유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집 귀신같은 아내를 떠올렸다. 근데 그녀는 정말 바람이 났던 걸까? 그래, 잠든 그 귀신을 깨워 의문투성인 그들의 로맨스를 얘기해 달라고 졸라보자. 어쩌면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만일 남자가 죽어버렸다면 그것처럼 재미있고 유쾌한 일도 없을 것이다. 만일 아내의 이야기가 재미있다면 신사업기획팀에서 일어난 아주 재미있는 내 쪽 이야기도 해주리라….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차가운 도시의 거리를 빠르게 걸어 나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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