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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김수진_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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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7회 작성일 17-04-30 12:28

본문

<소설 부문>


성명: 김수진 

성별: 여 

연령: 1987년생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외율길 10번길 34 1차 102동 102호 

연락처: 010-2902-8136

 















 

 

 

하루가 시작된다

 

 

 

 

 

 

 

*

 

5:00

여자가 눈을 뜬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뱉어내는 알람시계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는다. 여자의 얼굴에 날선 짜증이 스쳐지나간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여자는 눈가에 들어찬 눈곱을 비워내며 거울에 다가선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여자는 메마른 얼굴에 선을 짙게 긋고 표정을 옅게 펴 바른다. 주름이 순순히 들어선 얼굴에 무미건조한 표정이 얹어져있다. 여자가 윤기가 거덜 난 소박한 양의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올려 머리끈으로 질끈 묶는다. 검은 머리카락사이로 덧씌운 염색약이 벗겨져나간 흰 머리카락이 애처롭게 매달려있다. 여자는 눈 안에 잔뜩 고여 있는 잠을 억지로 게워내며, 하품을 입 밖으로 연거푸 뱉어낸다.

하루가 시작된다

 

 

*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어제의 저녁밥과 같은 모양새의 상차림이 식탁위에 간소하게 늘어져있다. 어제보다 한껏 짠맛의 농도가 짙어진 국에 밥을 만다. 남자는 국에 말은 밥을 입안에 기계적으로 밀어 넣는다. 입안에 한 움큼의 모래알이 굴러다닌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남자가 틈틈이 얼굴을 찡그린다. 켜놓은 텔레비전화면 안에서는 연일 소란스럽다. 남자가 우렁차게 돌을 씹는다. 남자의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밥알들 사이로 끼여 들어온 돌이 독보적인 이물감을 과시한다. 남자의 입안에 한숨이 가득 고인다.

 

 

*

 

남자가 통근버스에 올라탄다. 통근버스 안에서 뱉어내는 척박한 공기를 코 안에 집어넣으며, 남자는 빈자리에 빈약한 몸을 구겨 넣으며 앉는다.

안녕하세요

한참 까마득한 신참인 남자가, 남자에게 인사도 없이 지나간다. 남자는 언짢아진 속내를 달래듯이 마음속으로 혀를 세차게 찬다. 그리고 에어컨에서 뿜어대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따뜻한 바람을 드문드문 느끼며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눈을 감는다. 남자의 감은 눈이 제대로 정착하기도 전에 통근버스 안에 인공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정적사이로 느닷없이 벨소리(송대관, <해뜰날>)가 끼어든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여보세요

예의를 가차 없이 걷어찬 큰 목소리로, 중년의 여자가 자신의 자잘한 속사정을 여과 없이 방출하며 전화를 받는다. 남자는 귀안에 세차게 파고들어오는 소음을 억지로 밀어내며 감은 눈을 떠서 버스 창에 시선을 고정한다. 버스 창 너머의 하늘에는 해를 꼼꼼히 에워싼 탁한 색의 구름이 겹겹이 채워져 있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눈을 가까스로 뜬다. 소녀의 눈꺼풀이 눈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다. 칠판에는 알파벳이 어지럽게 널브러져있고, 선생님의 입에서 가차 없이 쏟아져 나오는 영어문장이 채 흡수되지 못하고 일부분이 허공에 맥없이 흩어진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선생님이 잠에 꽉 붙들린 채 졸고 있는 아이의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올린 채 위태롭게 흔들리던 머리를 반듯하게 고정시킨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교과서안에 늘어져있는 영어문장 곁에 기다란 머리카락을 매달고 있는 여자의 가냘픈 얼굴선이 채 끝나기 전에, 선생님은 펜을 쥐고 있는 아이의 손이 분주하게 영어문장 아래에 밑줄과 함께 칠판에 놓여있는 글자들을 받아 적게 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책상 밑에 고이 쥐고 있는 휴대폰에 눈동자가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아이의 휴대폰이 선생님의 손아귀에 반납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소녀가 입안에 고인 하품을 선생님의 눈을 피해 슬쩍 허공에 비워낸다.

합죽이가 됩시다,

배안에서 얄팍한 소리가 희미하게 불쑥 새어나온다. 수면의 연장을 위해 과감하게 끼니를 내팽개친 탓에 헐거워진 배안이 소란스럽다. 소녀는 텅 비어있는 베에 한껏 힘주며 배안을 가까스로 입막음한다. 소녀는 눈꺼풀의 육중한 무게와 배안에서 시도 때도 없이 뱉어내는 투정을 외롭게 버틴다. 고작 1교시 수업부터 소녀의 생체리듬이 험난하게 뒤틀린다.

 

 

*

 

달다

빈속에 들이키는 커피는 끝 맛의 여운이 짙다. 남은 커피를 빈틈없이 털어 입안에 들이붓고 기지개를 켠다. 여자는 식탁의자에서 굼뜨게 일어나 빈 컵을 잘 씻어 제자리에 돌려놓고 거실로 들어선다. 여자의 눈이 닿는 곳마다 막 청소를 끝낸 말끔한 상태의 반듯함이 고르게 번져있다. 가족들이 만들어낸 어수선함이 걷어진,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는 찰나의 안도감이 여자의 마음 한편에 들어찬다. 여자는 불쑥 죄어오는 약간의 죄책감을 털어내려 입술의 양끝을 최대한 끌어올려 웃는다. 여자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간다.

시계를 본다

텔레비전을 켠다. 리모컨을 재촉하여 고정한 텔레비전화면에는 드라마시작을 예고하며 각양각색의 광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자는 지난 내용을 머리 안에서 되새김질하며 텔레비전화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살아온 삶인 여자와 이생의기로마다 적당한 선택을 하며 살아온 삶인 남자가 있다. 여자와 남자는 선이라는 이름으로, 온도조절에 실패한 평균이하의 맛의 커피를 홀짝이며 마주 않아 있었다. 여자의 눈에 남자는 처자식은 굶겨죽이지 않을 다부진 인상이 얼굴에 들어있다는 맞선직전까지 쏟아낸 부모님이 설명과 들어맞아보였고, 남자의 눈에 여자는 남자의 적당한 선택사항에 과분할 정도로 부합했다.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 여자와 남자사이에는 결혼이라는 형태가 단단하게 갖추어져 갔다. 양가 부모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여자와 남자의 맞선은 결혼까지 양가 부모님의 강력한 주도로 순풍에 돛달 듯이 순조로웠다.

 

 

*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남자는 거대한 기계가 뱉어내는 육중한 무게의 철 위에 쉴 새 없이 색을 입힌다. 남자의 손에 쥐어져있는 스프레이에서 새어나오는, 코를 세차게 후벼 파는 듯이 싸한 냄새가, 남자의 얼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마스크를 날카롭게 뚫고 남자의 폐에 차곡차곡 쌓인다.

 

(01)(02)(03)(04)(05)(06)(07)

(08)(0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32)(33)(34)(35)

(36)(37)(38)(39)(40)(41)(42)

(43)(44)(45)

 

남자는 손을 기계같이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복권에 새겨질 숫자를 생각한다. 복권에 기대는 희망을 남자는 맹신하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일련의 하루에 온종일 쏟아내는 노동으로 일궈낸 돈으로는 남자의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범위가 남자에게 성이 차지 않았다. 남자의 머리 안에 숫자들이 제각각 모양을 달리하며 매달린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갓 입사한 청년이 조장의 마구잡이로 퍼부어대는, 욕설이 군데군데 찌들어있는 잔소리를 맨몸으로 버티고 있다. 청년의 얼굴에는 여태껏 잘 보살핌을 받은 앳된 인상이 잘 배여 있다. 남자는 청년의 호된 사회생활에 산전수전이 고스란히 축적되어있는 동료로서 탐탁지 않은 질타가 남자의 눈 안에 깊숙하게 번지면서도, 자식 딸린 부모로서의 안타까움이 마음 한편에 아련하게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남자는 마음에 강력하게 다짐을 새겨 넣는다.

내 자식은 나처럼 살게 하지 않겠다.

남자의 다양한 감정소모에도 아랑곳없이 철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남자의 손은 기계같이 바쁘게 움직인다.

 

 

*

 

남자는 단순히 배안의 무게를 채우기 위해 입을 움직였다. 오전의 작업을 간신히 버텨낸 작업자들의 긴 줄의 대열에서 기계같이 퍼 담은 밥을 밀어 넣는다. 남자의 주변에서는 농담과 잡담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시끄러웠지만, 남자는 외따로 떨어진 채 밥만 묵묵히 입안에 집어넣었다.

귀찮다

남자는 분위기에 모나지 않을 정도의 말주변을 입안에 장착하고 있었지만, 대화에 끼어들 여력까지도 탈탈 털어 박탈될 만큼 피곤이 축적되어 있는 남자는 귀안에 새어 들어오는 소리마저 차단한 채 숟가락질만 분주하게 했다. 남자의 식판위에는 소고기국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국에는 무만 한적하게 떠있고, 커다란 갈치구이에서는 비린내가 쏟아져 나온다. 남자는 평이한, 어묵조림과 김치에 의지한 채 밥을 삼킨다. 간간히 입안에 떠 넣은 국에서 소고기향이 간헐적으로 난다. 채 씹지 못하고 억지로 우겨넣은 음식이 소화되지 못하고 배안을 무겁게 짓누른다.

배가 아프다

 

 

*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윗집에서 청소기 움직이는 소리가 온전하게 내리꽂힌다. 그리고 옆집 아이의 신경질을 동반한 짜증이 스며있는 울음소리도 날카롭게 박힌다. 아랫집에서는 수도관에서 새어나오는 물소리가 곁들어진 세탁기소리가 간간히 툭툭 파고들어온다. 낡은 아파트의 노쇠한 벽을 뚫고 새어 들어오는 주변 집들의 평범한 일상이 적나라하게 여자의 집에 스며들어온다. 여자는 세월의 손때가 차곡차곡 가라앉아있는 낡은 지갑을 챙겨 다양한 생활소음을 간직하고 있는 노후한 집밖으로 나선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여자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고 선다. 엘리베이터 문 옆에는 금연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종이가 나붙어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여자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안의 갓 뱉어낸 음식물쓰레기냄새와 장시간 방치된 오줌지린 냄새가 여자의 코 안에 집요하게 파고든다. 여자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번진다. 여자는 엘리베이터 안의 버튼을 누르고, 여자의 빈약한 무게감의 지갑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여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입구로 걸어 나온다. 아파트입구에 노인이 한손에 지팡이를 쥔 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노인의 옆에 붙어있는 전단지에는 사람을 찾습니다, 라는 문장아래에, 여자가 서있는 아파트이름과 함께 노인의 얼굴이 커다랗게 박혀있었다. 여자는 초면의 노인이 무사히 제자리로 귀환한 것에 내심 안도하며, 노인의 곁을 스쳐지나간다.

 

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면은

백금의 보석반지 하나 살테야

그리고 텔레비도 한 대 사놓지

그것 참 좋아요 너무 좋아 말어라

아서라 백만 원에 헛 꿈꾸다가

다 썩은 레디오도 하품을 하겠네

 

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면은

그랜드 피아노도 한 대 살테야

그리고 자가용도 한 대 사놓지

아이 참 좋아라 너무 돌지 말어라

이것 참 야단났네 백만 원의 꿈에

엉터리 토정비결 믿은 게 바보야

 

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면은

타이루 양옥집을 높이 질테야

그리고 로케트로 달나라 가지

아이 참 무서워 누가 태워준다냐

아서라 백만 원에 잠꼬대 말고

구로동 공영주택 수속을 해보자

 

여자는 노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연약한 노랫소리(김용만차은희, <백만원이 생긴다면>)를 귓등으로 스쳐 보내고, 머리 안에서 시장에서 사야할 품목들을 찬찬히 정리하며 버스정류장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여자가 마음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노인의 노랫가락을 되뇐다.

 

 

*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허공에 나부끼는 대량의 먼지 틈새로 햇살이 신경질적으로 가라앉아있는, 소금기를 흡수한 다량의 냄새와 거북한 기름 냄새가 밴 교실에서는 점심시간동안의 싱싱한 활기를 싹 걷어간 배부른 노곤함이 배여 있다. 소녀의 책상위에 펼쳐져있는 교과서위에는 사설시조(작자미상, <일신이 사쟈한이>)가 놓여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다 같이 교과서를 읽힌다. 교실에서 온종일 방치된 채 우두커니 자리만 지키고 있던 소녀의 무거운 입이 움직인다. 빈약하게 가라앉아있는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난다. 아이들의 저마다의 목소리가 포개어져서 교실 안에 자욱하게 배여 있는 노곤함을 밀어낸다.

 

이 몸이 살자하니 무는 것이 많아 견디지 못하겠구나.

피의 껍질 같은 작은 이, 보리알같이 크고 살찐 이, 굶주린 이, 막 알에서 깨어난 이, 작은 벼룩, 굵은 벼룩, 강벼룩, 왜벼룩, 기는 놈, 뛰는 놈에 비파같이 넓적한 빈대새끼, 사령 같은 큰 등에 각다귀, 사마귀, 하얀 바퀴벌레, 누런 바퀴벌레, 바구미, 고자리, 부리가 뾰족한 모기, 다리가 기다란 모기, 야윈 모기, 살찐 모기, 그리마, 뾰록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물기도 하고 쏘기도 하고 빨기도 하고 뜯기도 하는 것이 당비루보다 더 심하고 고약하구나.

그중에서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은 오뉴월 복더위에 쉬파리인가 하노라.

 

벌레가 소녀를 에워싸고 있다. 벌레가 윙윙거린다. 바짝 날선 벌레들이 빚어낸 생채기가 소녀의 몸 안에 날카롭게 새겨진다. 짙은 색의 여드름이 흩뿌려진, 여린 인상의, 소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악의가 쏟아진다.

 

아이들의 교과서읽기가 일제히 끝나고, 선생님의 나른함이 고르게 배여 있는 목소리가 덧씌워진 분주한 설명이 이어진다. 소녀는 선생님의 고루한 설명을 교과서위에 반은 받아 적고 반은 놓쳐버린다. 소녀의 눈꺼풀이 눈 위에 위태롭게 매달린다. 소녀는 연필을 내팽개치고 교과서를 들춘다. 소녀의 손이 머문 페이지위에 놓여있는 사설시조(작자미상, <한슴아 셰한슴아>)를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으로 쫒는다.

 

한숨아 가느다란 한숨아 네 어느 틈으로 들어오느냐?

고모장지, 세살장지, 가로닫이, 암톨쩌귀, 수톨쩌귀, 배목걸쇠 뚝딱 박고 크나큰 자물쇠로 깊이깊이 채웠는데 병풍이라 덜컥 접은 족자처럼 데굴데굴 마느냐? 네 어느 틈으로 들어오느냐?

어찌된 일인지 네가 오는 날 밤이면 잠 못 들어 하노라.

 

 

*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억지로 떼어놓았던 잠이 남자에게 스멀스멀 들러붙는다. 남자는 하품을 크게 비워낸다. 남자의 양어깨에 무거운 노곤함이 고르게 내려앉는다. 남자는 거대한 기계가 뱉어내는 육중한 무게의 철 위에 쉴 새 없이 색을 입힌다. 남자의 손에 쥐어져있는 스프레이에서 새어나오는, 코를 세차게 후벼 파는 듯이 싸한 냄새가, 남자의 얼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마스크를 날카롭게 뚫고 남자의 폐에 차곡차곡 쌓인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남자의 시야에 갓 입사한 청년이 닿지 않는다. 남자는 청녀의 부재를 확인한다. 남자는 잘 보살핌 받은 앳된 인상의 청년의 얼굴을 머리 안에 가만히 상기시키며, 동료로서의 질책을 꾹꾹 눌러 담은 한숨과 자식 딸린 부모로서의 안쓰러움을 수반한 안도감이 동시에 남자의 마음 한편에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의 눈에 깊숙이 쑤셔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얼굴을 찬찬히 떠올리다가 힘겹게 지워버린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남자가 거슬리는 인기척에 얼굴을 약간 구긴다. 반쯤 헐벗은 머리에 겉늙어 보이는 얼굴의 회사동료가 더딘 손을 요령 없이 움직인다. 이전의 직장에서 과장까지 진급했다가 부당한 정리해고를 당하고 벼랑 끝에서 지금의 공장에 들어선 회사동료에게 사람들은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정신노동만을 해왔던 회사동료의, 익숙해지지 않는 육체노동의 잦은 실수에 의해 크고 작은 손해를 받은 사람들은 회사동료를 서서히 꺼려했다. 남자보다 낮은 연배의 조장이 남자의 근처에서 큰 목소리로 커다란 기계에 간신히 붙들려있는 사람들에게 불량이라는 단어를 입에 고의적으로 매달고 다니면서 노골적으로 질타를 한다. 왕년의 혈기를 가슴속에 묻어둔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손을 움직인다. 남자의 눈이 슬쩍 시계에 닿는다. 시계가 굼뜨게 움직인다.

 

 

*

 

시장에 가면

햇살이 얼굴 전체에 고르게 비집고 들어온다. 버스 창 너머로 스며든 봄의 여린 기척이 여자의 뺨에 살짝 닿는다. 여자의 발밑에 놓여있는 비닐봉지에서, 한껏 삐져나온 대파냄까지 가미된, 생선비린내가 간간히 새어나온다. 버스 창에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들을 눈으로 쫒고 있는 여자의 머리 안으로 서서히 생각이 비집고 들어온다.

 

시장은 예전의 빡빡함이 밀려나가고 나날이 한적함이 채워져 가고 있다. 여자는 시장 안의 늘어가는 빈 공간만큼 빈약해져가는 지갑의 무게를 신경 쓰며, 두 개의 비닐봉지를 양손에 각각 든 채 시장 안을 거닌다. 비닐봉지를 비집고나온 대파가 여자의 손을 건드리며 여자의 신경에 간간히 거슬렸고, 무가 들어찬 비닐봉지가 여자의 손에 묵직한 무게감을 과시한다.

시장에 가면,

고등어도 있고(비싸다), 고등어도 있고(비싸다), 고등어도 있고(비싸다), 여자는 떨이로 싸게 파는 작고 야윈 고등어를 뭉텅이로 산다.

시장에 가면,

북어도 있고(비싸다), 북어도 있고(비싸다), 북어도 있고(비싸다), 여자는 왜소한 체격의 과하게 말라 쪼그라진 북어를 산다.

시장에 가면,

딸기도 있고(비싸다), 딸기도 있고(비싸다), 딸기도 있고(비싸다), 여자는 딸기 곁에 나란히 놓여있는 적당한 가격의 신맛이 겉에 넉넉하게 묻어있는 사과를 산다.

여자는 손에 추가로 얹어진 봉지의 무게를 그대로 받아내며 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여자의 눈에 낯익은 풍경이 서서히 스며들어온다. 여자의 생각이 닫히고 여자는 서둘러 하차 벨을 누른다. 여자의 발밑에 놓여있는 비닐봉지에서, 한껏 삐져나온 대파냄새까지 가미된, 생선비린내가 간간히 새어나온다.

 

 

*

 

따르릉 따르릉 전화왔어요

익숙한 벨소리에 습관적으로 여자의 손이 휴대폰을 집는다. 휴대폰 안에서 한껏 나긋한 톤으로 무장한, 홍보라기보다는 강매수준의 잘 발린 설명이 일방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여자는 제지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어쭙잖은 상태로 방치된다. 여자의 주변에는 햇빛과 바람을, 고르게 머금은 잘 마른 빨래가 미처 정돈되지 못한 채 놓여있다. 여자는 대항할만한 적당한 말을 어설프게 늘어놓다가 포기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여자의 얼굴에 자책이 스며있는 짜증이 남는다. 휴대폰을 손에서 비워내고 빨래를 갠다. 켜켜이 개어져있는 빨래사이로 청량한 냄새가 흩어져 나온다. 노을이 적당히 어우러진 하늘에는 밤의 기척이 아득하게 내비친다. 여자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화면에 생활정보프로그램을 고정한다.

 

여자와 남자는 숱하게 싸웠다. 여자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남자의 눈에는 화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자의 혹독한 절약과 남자의 쉴 틈 없이 빠듯한 노동에도 집안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잦은 이사만큼 여자와 남자의 사이도 차츰 서먹해져갔다. 여자와 남자의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때쯤, 느닷없이 여자는 엄마가 되고 남자는 아빠가 됐다. 여자와 남자의 느슨해진 사이는 아이에 의해 견고하게 조여졌다. 여자의 혹독한 절약은 강화되었고, 남자의 쉴 틈 없는 빠듯한 노동은 물불가릴 것 없이 추가되었다. 아이는 툭하면 아팠다. 여자와 남자는 아이가 아플 때마다 산산이 깎여 내려가는 돈만큼보다도 가슴이 가차 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아이는 서서히 회복되어갔다. 아이의 병치레에 한시름 놓게 될 때쯤, 여자와 남자는 아이의 장래에 급변하게 눈을 돌렸다. 여자와 남자는 아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는 공부라는 단어를 입에 수시로 매달고 다니면서 아이를 향해 정조준해서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서서히 여자와 남자를 향해 견고한 벽을 세웠다. 여자와 남자는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없는 집안살림아래에, 아이의 견고한 벽에 가로막혀 사이가 차츰 서먹해져갔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역할에 익숙해져갔다.

 

 

*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남자는 밥을 입에 밀어 넣으면서, 잔업까지 얹어서 혹사한 몸을 캔 맥주로 억지로 달랜다. 차가운 맥주 한 모금 안에 짓눌린 고단함이 일시적으로 비워진다. 식탁위에는 고등어조림, 검정콩조림, 김치가 줄지어 놓여있는 아래에, 밥과 북엇국이 나란히 놓여있다. 켜놓은 텔레비전화면 안에서는 여전히 소란스럽다. 목구멍에서 밀고나오는 트림을 입 밖으로 꺼낸다. 남자는 연거푸 트림을 쏟아낸다.

다음 소식입니다

여자의 입에서 나열되는 각종공과금, 집세, 학교공납금, 학교급식비, 생활비의 끝에 여자의 잔소리와 텔레비전의 소리가 겹친다. 남자는 연일 연달아 식탁위에 놓여있는 검정콩조림과 김치를 배제하고, 고등어조림과 북엇국에만 수저를 기웃거린다. 남자는 남아있는 캔 맥주를 입안에 들이붓는다. 목구멍에서 밀고나오는 트림을 입 밖으로 꺼낸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잘 깎아진 반달모양의 사과에서 무언의 협박이 배어나온다. 사과에 얹어져있는 부모님의 커다란 시선이 소녀의 비좁은 어깨에 묵직하게 각인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사과를 씹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사과를 목구멍 안으로 넘긴다.

시다

책상위에 켜져 있는 스탠드불빛 안에는 문제집이 펼쳐져있고, 소녀는 연필을 쥐고 있는 손을 고의적으로 방치하고 있다. 소녀가 필통에서 커터 칼을 꺼낸다. 그리고 손목에 커터 칼을 겨눈다.

 

다음에 이어질 소녀의 행동으로 알맞은 것을 고르시오.

긋는다.

긋는다.

긋는다.

긋는다.

긋는다.

 

커터 칼은 순간 일시정지상태로 허공에 방치되다가 도로 필통에 들어간다.

시시하다

 

 

*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여자는 세월이 잔뜩 끼여 있는 얼굴에 수분크림을 듬뿍 바른다. 세월을 거스르기에는 턱없이 부질없는 행동이지만 여자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여자의 얼굴에 수놓아진 세월을 걷어내려고 한다. 얼굴에 인공적인 생기를 덧붙인다. 여자의 풀어헤친 소박한 양의 머리카락사이로 덧씌운 염색약이 벗겨져나간 흰 머리카락이 애처롭게 매달려있다.

불을 끈다

백열등이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빛을 잃는다. 여자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는다. 윗집의 때늦은 청소기소리가 여자의 귀에 날카롭게 매달린다. 감은 눈 사이로 짜증이 스며든다. 눈 안에 한줌의 모래가 지분거린다. 여자의 눈 안에서 나뒹구는 한줌의 모래알을 밀어내고 잠을 억지로 끄집어낸다. 잠의 틈새로 꿈이 끼어들어온다.

 

다음 소식입니다. ○○에서 일가족 세 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로 실종시점이 정확하지 않아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

켜놓은 텔레비전화면에 틈틈이 눈길을 보태며 남자가 묵묵히 밥을 먹는다. 여자는 두 사람의, 출근과 등교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자의 분주한 움직임사이로 간당하게 매달려있던 흰 머리카락 한 올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소녀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계바늘의 움직임과 타협하며 잠을 조금씩 늘리고 있다.

 

여자의 고른 숨결사이로 밤이 겹겹이 스며든다.

하루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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