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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소설_최세은_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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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6회 작성일 17-05-01 10:29

본문

<소설 부문>


성명 : 최세은

성별 :

연령 : 27

주소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장승배기로 145, 11303

연락처 : 010-5612-5423

  

 

 

 

 

 

 

 

 

 

 

 

  28기 연수생  

 

 

 

 

사건의 발단은 워크샵이었다. 나는 이번 해에 겨우 취업에 성공해 세상 모든 것이 완벽해보였던 일개 신입사원이었고, 나를 포함한 70명의 연수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을 하고도 2년 동안 백수로 지내는 사이 자존감이고 나발이고 다 까먹은지 오래였다. 입사만 할 수 있다면, 어디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저녁이 있는 삶따위는 개나 줘버려도 괜찮을 판이었다. 그런데다 또 자존심은 강해서, 아무데나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이제한 같은 거 있는 거 아냐? 글쎄다, 인재라면. 내가 그런 인재가 안되잖아. 그럼... 글쎄다.

진지하게 고민을 원하는 내가 우습게 느껴질만큼 친구놈들의 대답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결국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한 나는 승자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워크샵은 여수에서 이뤄졌다. 회사와 제휴를 맺고 있는 리조트에서 보내는 23일 이었다. 경기도의 변두리에 있는 연수원에서 이미 2주를 보낸 후였다. 그 후 주말이 지나면 정말 회사원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동기라는 이름의 끈끈함을 안고서 마지막 소풍을 가는 기분으로 워크샵을 맞이했다.

이야 역시 대기업은 다르구나.”

매번 자주 나오는 대사와 함께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딱봐도 자리값 하게 생긴 리조트는 얼핏 상상하던 허술한 콘도 와는 차원이 달랐다. 남자 동기들이 마치 고등학생이 된 것 마냥 깐죽거리고 웃었다. 그 속에서 나도 한껏 들떠있었다.

단체복 입고 일단 로비로 모이세요.”

회사에서 일제히 나눠준 단체복은 등산복이었다. 빨간 색에 하얀 스프라이트가 팔뚝이랑 허리부분에 포인트를 주고있는. 물론 가슴께에 굵직하게 새겨져 있는 회사로고는 당연한 옵션이었다. 이래서는 평소에 입고 다니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오전에는 축구를 하고, 바닷가를 걷고, 회를 먹었다.

저녁을 먹고 각자의 숙소로 들어갔다. 여자방 남자방 나뉘어 5명씩 잡았는데도 14개의 방이었다. 방의 구조는 좌우 반전이 층별로 이루어져 있었고, 나무결 모양의 장판이 깔린 비교적 깔끔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방이 제법 넓어서 맘에 들었다. 운 좋게 바다를 향한 방이 걸려서 더 좋았다.

 

9시가 지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실컷 자려고 준비를 하던 여자 동기들이 투덜대며 하나 둘 방으로 들어왔다. 머리가 젖어있었다. 그새 씻다니. 들어오다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과장과 차장을 보고는 후다닥 구석으로 앉았다. 나는 딱히 씻지도 않았고,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터라 피곤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래서 연락이 오자마자 바로 출두할 수 있었다. 내 룸메이트인 동기들도 마찬가지라 줄줄이 들어왔다. 우리 5명이 가장 먼저 왔을 때 인사부 차장이 말했다.

역시 자세가 되어있네 니들.”

35명이 다 들어오니 생각보다 북적였다. 옆방에도 35명이 모여있을 터였다. 술자리야 연수중에도 빠짐없이 행해져 오는 것이지만 이렇게들 불러놓고 자, 이제부터 술판이다, 라고 하려는게 조금 우스웠다. 가장 먼저 온 나는 과자를 까서 바닥에 늘어놓고, 비닐에 싸인 맥주와 소주를 뜯어서 종이컵과 함께 적당히 배치했다. 술집은 분위기와 운치라도 있었지 이곳은 너무나 밝았다. 그 형광등 아래서 우리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가장 안좋은 자리는 늦게 온 연수생들의 몫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과 함께 순식간에 방안을 훑고 자리에 앉았다. 마른 웃음을 지으면서 잘못걸렸다는 기운을 적나라하게 뿜어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마지막 한 명이 들어올 때까지 침묵을 유지하는 이 상황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애들도 지들끼리 마실때여야 술이 좋은거였다.

사람이 다 모이고나자 차장이 운을 떼었다. 고생해주신 여러분들을 위한 소소한 자리.. 라는 말로 시작된 연설은 짧게 끝날 것 같으면서도 길게 이어졌다. 말이 끝났을 때 우리는 열렬히 박수를 쳤다. 차장은 근사한 무대를 마친듯한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 다음 몫은 김철수였다. 김철수라는 건 모 아무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김철수라는 말이다. 그는 김철수라는 흔해빠져 진부하기까지 한 이름을 가지고서 동기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위치를 고수했다.

치고 빠지기. 아부하기. 너무 타당해서 황당하기까지 한 논리적 의견 어필. 이 외에도 그를 수식할 수 있는 말은 무궁무진했다. 처음엔 어이없다가 나중에가서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너도 참 대단하다. 나는 그를 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진부한 대사를 머릿 속으로 읊었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사회자역할을 넘겨받았다. 맨 처음엔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덕담까지 해주신 차장님 .. 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다시한번 감사를 .. 이라고 끝냈다. 차장을 바라보는 김철수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말그대로 반짝반짝. 차장은 낮간지러운 듯 뒷목을 긁적였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랄. 아주 드라마를 찍어요.”

틈을 내서 옆에 있던 성진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바라보지는 않고 다 안다는 듯이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크크, 성진이 낮게 웃었다. 나도 웃음이 나왔지만 차장과 대각선상에 있는 자리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김철수는 능력이 있었다. 학벌도 좋고 대외활동도 많았다. 회장경력도 있고, 토익성적도 만점에 가까웠다. 사교성은 보다시피 충만해서..뒤에서는 저런 꼴이 짜증난다고 중얼거려도 같이 놀고먹는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때론 그의 처세술 덕분에 상황을 원만하게 넘길 수 있는 경우도 많았다.

성진은 유달리 김철수를 싫어했다. 저런 버러지 같은 놈들 때문에 사회가 썩고 있다고 했다. 저런 놈이 저런 꼰대가 된다고 치를 떨었다. 성진은 김철수와 같은 학교를 나왔고, 같은 동아리에 있었으며, 같은 학번이었다. 성적도 둘은 엇비슷했다. 동족혐오? 처음에 뭣모르고 말했다가 진짜 얻어맞을 뻔했다.

내 이름은 김선진이고 성진은 이성진이다. 얼핏 잘못부르면 헷갈리기 일쑤라 동기들의 발음은 언제나 나를 부르는지 성진을 부르는 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 많은 동기들 중 같은 나이는 우리 셋밖에 없었다. 유달리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성진과, 여느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호의를 적당히 던져주는 김철수. 나는?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취업을 하기 전까지 나는 취업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자소서를 어떻게 쓸 것인지, 인적성은 어떻게 풀 것인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하라고 했지만, 진정 하고 싶은 일인것처럼 보이는 자소서와 면접 답변은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다. 그래서 합격 문자를 받은 이유로 나는 아무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무난히 회사만 다니면 될 것이다. 기뻐하신 부모님, 축하해준 친구들, 회사 이름을 말하니 놀라던 친척들, 주위사람들. 그거면 충분했다.

김전진

, .”

나는 재빨리 일어나 한발 짝 앞으로 나섰다. 28기 여러분께 술한잔씩은 돌려야하지 않겠냐며 차장이 제 옆 김철수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자리를 헤집고 들어왔다. 꼭 바로 앞이 아닌 1미터정도 떨어진 곳에서 호명했기 때문에 연수생들은 바닥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들어야만 했다. 15번째인 내 차례가 생각보다 금방 왔다.

너 김전진 맞냐?”

김선진입니다. 차장님.”

근데 왜 대답해.”

..?”

하하. 장난이다. 짜식 쫄기는..”

김전진이란건 내가 면접을 볼 때 쓴 키워드였다. 회사입장에서 이래저래 다 비슷해보이는 사람들 중에 남들보다 눈에 띄려면 특별한 게 하나 필요하긴 했다. 이때 가서야 나는 부모님께 내 이름에 대해 감사했다. 여자같기도 하고 남자같기도 하고, 뭔가 되다만 듯 어설픈 내 이름에 작대기 하나를 갖다 붙이니 아주 그럴싸했다.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스펙을 가진 대졸은 발에 채일정도로 많을 것이다.

이름에 너무 공을 들인 탓인지, 인사부 사람들은 더러 나를 김전진으로 헷갈려하기도 했다. 네가 어디로 전진한다고 했던가? 바로 A기업입니다. 그래그래 그 정신이야.

사장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을 때도 그 방법을 써먹었다. 사장은 그 전진인가, 후진인가, 걔는 잘한대? 라고 물었다고. 그래서 내 이름은 전진에 가려진 선진이었다.

콸콸콸. 종이컵 가득 담긴 소주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차장이 호통쳤다. 말이 호통이지 이미 취하기 시작한거 같아서 반쯤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사내자식이 쫄기는. 너처럼 포부가 없으면 안돼요. 그래서 내가 특별히 애정을 담아 따랐다.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원샷! 알지?”

어디서 포부를 운운한건지 모르겠다. 사내자식 이라는 표현으로 나를 싸잡은 것도, 포부가 없다는 말도, 애정 이라는 헛소리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다.

그래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 소주 한 컵 정도야, 대학 다닐 때는 끝도 없이 마셨다. 단숨에 벌컥 벌컥 들이마셨다. 일단 마시긴 마셨는데, 순식간에 술이 올랐다. 쓰고 기분나빴다.

, 진짜 마셨네? 무리하지마~”

, . 얼굴이 혐오를 그리려다 굳었다. 취하지 않았다. 아직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 차장은 성진을 불렀다. 성진이 다가오면서 나를 슬쩍 보았다. 적당히 해.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적당히가 되냐. 내가 시선으로 차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의외로 내 옆에 다가와 나를 다독인건 김철수였다. 그는 이런데에도 능한 듯 싶었다.

선진아, 더럽지? 힘내. 원래 사회가 그래.”

너는 나보다 사회생활 오래한 것처럼 말한다?”

하하. 그냥, 다 저렇게 먹고 사는거지. 쟤네들 위로받고 싶은거야. 한번 스타가 되고싶은 심리같은거라고. 그러면 그냥 우리가 박수 좀만 쳐주면 되는거야.”

나는 할말을 잃었다. 얼핏 내 눈에, 성진이 눈에, 너는 같은 족속으로 보였다고 말하면 이번엔 김철수한테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물이나 줘.”

어 그래그래. 잠깐만.”

그는 차장을 혐오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짧은 대화 속에서 김철수가 참고있는 현실이란게 보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김철수는 물을 가져다주고 어디로 쌩하니 사라졌다. 다른 사람을 달래주러 간 모양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타이밍 좋게 성진이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 미친거 아니냐. 어우 존나 써.”

성진도 애주가이지만 그는 좀 고급스런 취향이었다. 와인이나 보드카 같은?

퉤퉤 하며 이미 마셔버린 소주를 뱉을 것처럼 그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얼굴은 멀쩡하다. 나는 벌써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봐. 여자애들한테도 저거 먹이고 있음.”

?”

미친거지. 하아.. 어떡하냐. 내가 막아준다고 세 잔정도 더 받아먹었는데.. 이제 못하겠어.”

그 사이 흑기사 노릇까지 하며 열심히 달렸던 모양이다. 나는 물이나 마시고 있었는데.

어쩌지?”

뭘 어떡해. 저 놈을 잠재워야지. , 김철수 출두한다. 그래그래 김철수 네가 많이 먹고 희생 좀 해라.”

나는 누가들을까 조심하면서 차장쪽으로 다가가 넙죽넙죽 잔을 받아 마시는 김철수를 보았다. 쟤도 피곤할텐데.

, 우리 슬아 받아야지?!”

유달리 우렁차게 커진 차장의 목소리 너머로 슬아의 동그란 눈망울이 보였다. 눈썹이 아래로 쳐진 것이, 차장의 어깨에 가려진 입꼬리는 웃고있을지언정 내 쪽에서 보기에는 우는 것처럼 보였다.

양슬아는 70명 동기들 중 김철수만큼이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한마디로 가장 예뻤다. 매력이 있다 어쩌다 수준이 아닌 외모가 단연 이채를 띄는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는 연수생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 강의하러 들어오는 강사들은 한번 쓰윽 둘러보고 양슬아를 가리키며 넌 왜그렇게 예쁘냐.’ 는 말을 저도 모르게 꺼낼 정도였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일 만큼, 그녀는 예뻤다. 동기 남자들은 양슬아에게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구애했지만 정작 슬아 본인은 남자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예쁘니까 콧대도 높나보다... 대충 그렇게 생각했는데 연수 2주 차가 반절이 지날 무렵, 연수생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김철수와 양슬아가 썸을 타고 있다.

인정하기 싫은 한 마디였지만 모두가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자 중에 가장 돋보이는 건 김철수였고, 여자 중에 가장 돋보이는 건 양슬아였으니까. 모르기가 더 어려울 사실이었다.

김철수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매너좋은, 무리의 중심을 노리는 능글맞은 남자라면 한 폭의 그림같은 양슬아는 얼굴만큼은 기가 세지 못한 여자였다. 적당히 말할 줄 알고 적당히 관계를 형성할 줄 알았지만, 본인 인기만큼 사교성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둘이 사귈까 말까 하는 기로에 서있다니.

가십이란 건 그런거다. 내 얘기가 아니라 남 얘기라 재미있는 것. 연예인은 너무 공통되고 일반화 된 사항이다. 우리는 28기라는 이름아래에 한 무리로 묶여있었다. 이 속에서만 통용되는 가십이 절실했다. 구체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가십을 들은 동기들의 진귀한 표정을 본 이후 우리가 이토록 가십에 목말라 있었다고 깨달았다.

차장은 양슬아를 유독 예뻐했다. 항상 볼때마다 우리 슬아를 남발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 가지고 온 증명사진을 보면서 사진이 우리 슬아 예쁨을 다 못 담아냈다고 과장되게 한탄했다. 양슬아는 차장의 반응에 당황하여 얼굴이 새빨게졌다. 듣기 좋으라고, 아낀다고 차장은 주장하는 것 같았지만 왠지 그건 괴롭힘 같았다.

어디서 우리 우리 거려. 재수없게. , 저 웃는거봐라.”

정의를 논하는 성진은 김철수보다도 차장을 싫어했다. 명문대생이고 외모도 준수한데 한가지 단점은 입이 너무 거칠었다. 여과가 없고 짜증스런 말투가 주를 이루었다. 가끔씩 A기업이 별로인 이유를 들어가며 비하했다. ‘그래도 우리 여기 들어왔잖아.’ 내가 말하면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입이 곱다 할 수는 없는 편이었으나 성진의 찰진 욕과 불평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내 욕까지 그가 대신 해주고 있는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 설마 양슬아가 좋아서 김철수까지 싫은 거 아니지?”

뭔 개소리야, 김선진. 형아가 예쁘게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난 저런 타입 별로.”

양슬아가 마음 먹고 유혹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녀석이 성진이었다. 내가 봐온 성진은 그러했다. 슬아가 오빠라고 부르며 가끔씩 먼저 말을 걸어오면 얼굴이 풀어지는 걸 내가 몇 번 봤는데..어디서 되도 않는 거짓말을.

왜 내 말을 안믿냐. . 억울하다. 그리고 김철수 저건 처음부터 맘에 안들었어. 사바사바 하는게 딱 별로야.”

딱 별로야.

그 둘은 제법 잘 어울리는 듯 했다. 김철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당당함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기운을 품어내고 있어서 항상 활기찬 느낌이 들었다. 양슬아는 화려한 외모와 달리 수줍은 성격이었지만 김철수옆에 있으면 그 점이 되려 안정감을 주었다. 이미 사귀고 있는걸까? 남 연애사만큼 번거롭고 쓸데없는 것도 없다. 알고 있었지만 자꾸만 그 둘을 쳐다보게 되었다. 어쩌면 가십에 가장 목말랐던 건 난가?

차장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양슬아의 눈동자는 커졌다가 휘어졌다가 살짝 내리떴다가... 여러 가지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입모양이 보이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차장의 비위를 열심히 맞추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봉지를 넘어서 바닥에 삐져나온 새우깡을 주워 먹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주위는 시끄러웠고 내 옆에 있던 성진은 고개를 바닥으로 던지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마셨나 보군.

그새 나는 살짝 술이 깼다. 살인적인 소주컵은 싫었지만 몇 잔 정도라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진아. 괜찮아?”

어깨를 그러쥔 손에 내가 쳐다봤을 때 김철수가 난처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저기.. 차장님이 슬아 옆에..”

좀 오래있었나?”

30분 정도.”

김철수의 얼굴은 말하고 있었다. 좀 멀쩡해보이는 네가 우리 슬아좀 살려줘.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좀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예쁜 여자 앞에서 기사노릇을 하는 것도 썩 나쁠 건 없었다. 다른 남자 동기들은 거의 전멸 상태였다. 아무래도 차장 옆에 가면 실수할만한 녀석들만 남아있었다. 모두의 듬직한 김철수가 나를 지목해 도와달라고 한 것도 뭔가 으쓱했다.

너는 왜 안가고..?”

. 나는 좀 많이 가서.. 자꾸 그러면 차장님 심기 거슬릴 수도 있잖아.”

그 말이 타당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 말은 이해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차장의 심기를 걱정하는 김철수에게 오늘의 대단해를 날려주고서 나는 뚜벅 뚜벅 종이컵 술잔을 들고 가 차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저 차장님..한잔 주십시오.”

? 김전진! 술 받으러왔어? 그래그래.”

여전히 나는 김전진이었다. 차장은 아까보다 더 취해있었고 얼굴은 그만큼 더 풀려있었다. 내가 와서 술잔 상대가 넘어갈 때 양슬아는 웃으며 반쯤 울고 있었다. 그녀도 많이 취한 듯 보였다. 이거야 뭐 정말 공주 구하러 온 왕자같네.

그 이후로 나는 나를 놓고 차장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옆에 반쯤 깨진 자갈치 몇 개를 주워먹었을 뿐 나는 제대로 된 안주도 없이 연거푸 술을 퍼부었다. 차장을 상대로 이거라도 이기겠다 싶은 욕망인건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처음 몇 번은 술잔을 세었다. 나 한번, 차장 한번. 나 두 번, 차장 두 번. 하지만 어느순간 세는 것도 잊고 마셔댔다. 주위가 흐려지고 여기가 어딘지 판단이 안될쯔음 눈을 부릅뜨려했지만 다 떠지지 않았다.

실수하면 안되는데.

내 앞에는 차장이 있었다. ‘술 마시는 것도 다 사회생활이고 너희 능력을 펼치는 장이야.’ 라고 말하던 차장. 호형호제 하듯이 술 마시다가도 다음날이면 자잘한 실수들을 지적하며 우리를 깎아내리던 차장. ‘요즘 애들은..’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차장. 메신저 프로필사진에는 어린 두 딸과 함께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차장. 프로필문구는 일상을 소중히. 사랑한다 내 가족

..어쩐지 거지같네.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 아직 깜깜한 밤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술은 깨고도 남을 시간 아닌가? 하지만 아직 속이 안좋았다. 나는 취했다고 해서 먹은걸 게워낸 적은 없었다. 일단 입 속을 넘어 들어온 건 다시 위로 내뱉지 않는다. 소화력이 좋은건지 모르겠지만 이럴때는 토하면 좀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시간을 확인할까? 주위를 더듬거렸지만 스마트폰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었다. . 어딘가 있겠지. 모든게 귀찮았다.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눈동자만 굴려보았다.

혹시나 숙소로 왔을까 라는 예상과 달리 나는 술을 마시던 그 방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연수생들은 널부러져 있었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서, 자고있는데도 내뱉는 숨결에 지독한 알콜냄새가 났다. 한 곳에 쌓아놓은 소주와 맥주의 성이 이 사태를 짐작하게 해줄 뿐이었다.

부스럭. 과자봉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눈만뜬채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모두가 쥐죽은 듯이 자고 있는 이 방에서, 이질적인 소리에 나는 이상을 감지했다. 이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강한 예감. 자는 척 주위를 몰래 훔쳐보아야 된다는 생각. 나는 자다가 뒤척이는 사람처럼 으음, 하면서 몸을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몸을 돌린 쪽에서 눈을 반쯤떴다. 그리고 차장을 보았다.

아니, 차장이 왜?

인사부직원들은 본인들의 더 좋은 숙소로 이동해야 할 터였다. 취해서 여기서 잤나? 그런 것 치곤 그의 눈빛이 너무 멀쩡했다.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는 희번뜩한 흰자가 어두운 방안에 떠있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차장은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을 시선으로 쫓던 나는 경악했다. 그의 손은 양슬아의 다리사이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회색 레깅스에 트레이닝 반바지를 입은 그녀의 길게 뻗은 허벅지 사이로 더러운 손이 아귀를 틀려 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글쎄.

나는 벌떡 일어나 차장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물렁한 살이 잡혔다. 소름이 끼쳤다.

깜짝 놀란 차장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굳었다. 흠칫하는 기운이 나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삐꺽거리며 고개를 돌린 차장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조금은 안심한 표정에 속이 더 뒤틀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씩씩거리기만 할뿐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잠이 깬 눈만 살아서 다그쳤다. 변명이라도 해보시죠. 다행인건지 양슬아는 잠에 취해있었다.

차장이 나를 보고 슬그머니 웃었다. 온몸을 기분나쁜 벌레가 훑고 갔다.

잠깐만 따라 나오라는 듯 그는 일어섰다. 나도 순순히 그를 따라 나섰다. 소리없이 방안을 스르르 빠져나가는 차장의 몸체가 유령처럼 보였다. 차장과 다르게 나는 부스럭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내심 누군가 깨기를 바랬건만 내가 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방안도 어두웠지만 바깥도 매한가지였다. 차가운 바닷바람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철썩 철썩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검은 바다가 어울려 을씨년쓰러운 풍경을 자아냈다.

차장은 바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서 있었다. 급히 나오느라 대충 구겨 신고 나온 운동화를 질질 끌며 나도 그쪽으로 다가섰다. 돌연 차장이 몸을 돌렸고 나는 흠칫했다.

짜식.. 너 담배있냐?”

..없습니다.”

안 펴?”

.. 끊은지 좀 됐습니다.”

가볍게 차장이 뭔가를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들고보니 라이터였다. 일회용 싸구려 라이터.

내가 바라보니 고개를 까딱거린다. 나는 엉거주춤 다가가 그가 물고있는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바닷바람에 불씨가 약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후우, 차장이 깊게 한모금 내뺀 후 말했다.

잊어라.”

?”

못 알아들어? 잊으라구. 내가 너 잘 이끌어줄게.”

“...”

내가 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근데 무슨 범죄자 보듯 그래?”

차장은 정색한 얼굴로 기세를 담아 나를 내리 눌렀다. 쓸데없이 당당한 태도는 나 역시 예상밖이었다.

“...차장님이 잘못하셨잖아요...”

겨우 이딴 소리나 하고 있다니. 정의롭게 소리칠 요량이었는데 기죽은 목소리만 삐질삐질 새어나왔다. 바람이 목덜미에 서늘하게 내리쳤다.

뭐라고?”

정말 못들은 건지, 들었는데 모른 척 하는 건지 차장은 신경질적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러더니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이게 말이나 돼? 됐고, 넌 잊고 아무일도 없었던거다. 알겠지? 좀 시간이 필요한가 본데.. 머리 좀 식히고 들어가라.”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 차장이 터덜터덜 건물로 걸어갔다. 카악 퉤, 라고 땅바닥에 침을 뱉고서 자신의 숙소로 걸어간다.

어깨에 닿았던 축축한 손이 더러웠다.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벙쩌있던 나 자신이 무력했다. 스물여덟 해 동안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이 그의 앞에서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차장이 버리고 간 타다만 담배만 한참을 노려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발로 짓이겨 보았다. 꾸욱. 느낌도 없었지만 담배가 살짝 뭉그러졌다.

씨발.”

쾅 하고 내리 찍어봤다. , , .

담배가 차장인 것처럼 온 분노를 담았다. 미친사람처럼 조그만 담배만 짓밟던 나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몸이 지쳐버릴 때쯤 숙소로 들어갔다.

 

꿈을 꾸었다. 자다가 깨면 그 방이었다. 현실과 다른 건 양슬아가 깨어있었다는 것.

말간 눈망울이 애처롭게 호소하고 있었다. 도와줘야 해.

그런데 누군가 나를 붙잡고 말했다.

잊어.’

네가 할 수 있는게 있을 거 같냐?’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나는 소리쳤다. 팔을 마구잡이로 내둘렀다. . 뭔가에 손이 부딪쳤고 마지막으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 잘 이끌어줄게.’

 

, ..”

온 몸이 땀으로 젖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

안좋은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지만 희미한 담배냄새가 남아있었다. 담배를 끊고 나서 2년 정도 지나니 타인에게 베어있는 담배 냄새에도 민감해졌다. 차장의 담배냄새. 바닷가를 향해 연기를 내뿜던 그 옆얼굴..

“...”

아침부터 웬 욕? 근데 나도 욕나올거같아. 우욱.”

성진은 비교적 멀쩡한 얼굴로 말했다. 뒷머리가 까치집이 되어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태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말만 던진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김선진 너 해골같아. 피골 상접한거 보소. 간밤에 뭔 일 있었냐?”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어엿한 아침이었다. 술만 내리 마신 연수생들은 뷔페식의 아침식사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차장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동기들에게 아침인사를 받으며 웃음을 날리며, 된장국과 튀김을 접시에 담아오는 그 추악함이 역겨웠다. 덕분에 식욕이 말끔히 사라졌다.

아주 부어라 마셔라 해놓고서 멀쩡한거 봐라. , 역시 인간이 아니야.”

국에서 술냄새가 난다며 코를 킁킁거리고 있던 성진이 말했다. 나는 반응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기왕이면 차장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지우고 싶었다. 정말 잊고 싶은 건 나였다.

 

김철수가 나를 챙긴다.

생각치도 못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김철수는 내게 물을 가져다주고,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고, 뭐 필요한거 없냐며 내 앞에 음료수나 껌 같은걸 들이밀었다. 얜 또 왜이래.

선진아, 아 성진이도 있었네.”

그는 내 이름과 성진의 이름을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불렀다. 김철수가 부르면 나는 내 이름을 아주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지난밤 차장의 행동과 그에 따른 내 행동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중첩적 고민으로 짜증이 곤두서있었다. 처음엔 김철수가 미쳤나 싶었지만 그의 호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게 매우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들이 보기에 비교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가 내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는게 이상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쟤 왜저래?”

글쎄...”

쟤가 차장 따까리에서 너로 갈아탈 이유는 없지 않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철수가 사다준 오렌지주스를 마시던 손에 힘이 빠져버렸다.

유리병에 담겨있던 오렌지주스가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성진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고 나도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야 임마 김선진!”

성진이 애처롭게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돌아서 달렸다. 김철수에게 확인해야했다. 다행이 멀지 않은 곳에 김철수가 있었다. 달려가 그를 세운 후 다짜고짜 물었다.

너 어제 봤냐 설마?”

내 물음에 김철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대답하지 못한다. 엄지발가락 끝에서부터 오한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맥박이 펄떡 펄떡 뛰었다.

봤다. 그 상황을 나보다 먼저 알고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본다니. 말이나 되나?

미친놈.”

내 앞에서 그는 작아졌다. 그 김철수가 땅만 보고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나는 질려버렸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뛰어가듯 걸어가는 내 뒤에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나도 알아라고 김철수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마지막 날에도 꿈을 꿨다. 같은 내용이었고, 창의적이게도 추가된 건 김철수의 눈이었다. 내가 알던 당당한 김철수가 아닌 겁에 질린 눈이었다. 꿈 속의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낮에는 그 눈이 혐오스러웠지만 꿈속에서 나는 그를 연민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현실 속에 그도 괴로워했을 테지. 사실 미워할 건 차장인데, 나는 왜 김철수를 더 나쁜 인간으로 몰고 있는지. 나는 이윽고 한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어줍잖은 패기를 부리긴 했지만 내가 바꾼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차장은 내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후 늦은 시간 문자로 통보해온 잘 생각해봐가 전부였다. 뭐를? 잘 생각하고 당신 말을 수긍하라는거야?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김철수에게 차장은 어떤 존재인걸까. 거스르면 안되는 불문율이라도 있나? 그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이 끼치는 반경과 영향력을 계산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나.

머릿속에 맴도는 차장의 말과, 내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와, 그 후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누군가에게 기대지도 못하면서 김철수를 욕하는걸로 만족하려는 내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한 원초적 질문이 떠올랐다.

답은 나오지 않았고, 달라진 건 없었다.

내가 너 잘 이끌어줄게.’

말도 안되는 그 목소리가 끈질겼다. 대체 왜.

“...저기요 과장님.”

?” 선한 눈매의 여자 과장이 내게 물었다.

“..버스 좀 세워주세요. 토할 것 같아요.”

어딘가로 가던 버스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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