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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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신인발굴]_시_이수진_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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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
성명 (본명) | 김정(김하늬) |
성별 | 여자 |
연령 | 29세 |
주소 | 서울시 서대문구 독립문로10 삼호아파트 108동 708호 |
전화번호 | 010-4342-5317 |
귤껍질
여진은 귤을 손안에서 굴렸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귤은 처음보다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초록색 앞치마 앞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 그 손안에 노란 귤 하나가 울퉁불퉁하게 변했다. 동그랗고 단단하던 귤은 여진이 만지작거릴수록 공기가 들어가고 말랑말랑해지고 형태가 변했다. 여진은 귤을 깔까 말까 망설이다가 계산대 옆에 내려놓았다. 계산대는 녹색이었고 귤껍질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회색빛으로 변한 스크래치와 귤껍질에 가득한 곰보 자국이 귤의 아이덴티티였다.
일한 지 약 3시간째. 퇴근하려면 5시간은 더 일해야 했다. 과자나 우유도 보기 좋게 앞으로 당겨 놨다. 식사할 수 있는 서랍을 물걸레질하고 나니 꼭 해야 할 일은 끝난 것 같다. 바닥의 신발 얼룩도 닦아 놨다. 계속 이렇게 무료했으면. 그리고 딸랑하며 문에 달린 벨이 울렸다.
- 어서 오세요!
쉴 만 하면 손님이 와서 기가 막혔다. 손님은 우유 칸에서 한참 서성이고, 초콜릿 칸에서도 한참 머물렀다. 막상 집어 오는 건 계산대 바로 아래 있던 껌 하나. 껌도 바로 고른 게 아니라, 여러 종류의 껌 위에서 손이 한참을 방황했다. 자일리톨, 네가 선택됐구나.
- 에쎄 1밀리요.
껌 핀다고 담배 냄새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여진은 담배와 껌을 사 가는 손님을 비웃으려고 입꼬리를 쭉 올렸다가 다시 턱 끝까지 입꼬리를 내렸다. 읽을 책도 가져오지 않아 할 것도 없었다. 휴대전화의 인터넷 창을 열었다가,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카카오톡을 눌렀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껐다. 여진은 마음이 설렐만한 그런 알람을 기다렸지만, 휴대전화는 조용했다. 계산대 위의 귤은 여전히 못생겼다.
여진이 출입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갈색 뿔테가 어울리던 그 남자. 댄디 커트가 귀여운 사람이었다. 추운 겨울이라 큰 패딩 점퍼를 입고 다니지만, 가게 안은 더운지 들어오자마자 지퍼를 반 정도 풀곤 했다. 주먹만 한 얼굴, 그 하얀 얼굴이 검은 패딩 안에서 튀어나오면, 여진은 괜히 설렜다. 일정한 시각에 오는 건 아니지만, 여진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버틸 수 있었던 건 꾸준히 방문하는 그 남자 덕분이었다.
- 아가씨, 오늘도 표정이 굳었어!
- 아……. 어서 오세요.
이 아저씨 말고. 여진은 표정이 굳는 걸 숨기지 않았다. 하필 댄디 커트를 생각할 때 가장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보다니. 몸을 좌우로 흔들며 편의점 속을 방황하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봤다. 볼 때마다 같은 옷이었다. 카키색의 야상 점퍼와 카무플라주 패턴의 카고바지 그리고 검은 군화. 오늘은 점퍼에 달린 모자 대신에 비니를 쓰고 왔다. 카키색 점퍼 어깨춤의 하얀 가루가 유달리 눈에 쏙 들어왔다. 여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저씨는 들어와서 음료 냉장고 앞에 서기 전까지 모든 진열장 앞을 지나갔다. 빵, 과자, 라면, 일회용품 등. 음료 냉장고는 문과 마주 보고 있어서 바로 직진하면 될 것을, 사장이라도 된 것처럼 가게 구석구석을 훑었다. 무언가 트집 잡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 검사하려는 것 같았다. 여진이 아르바이트하다가 게으름을 피운 날이면 아저씨는 그걸 알아차리고 꼭 한마디씩 했다.
아가씨, 바닥이 더러워! 발자국이 많은데?
아가씨, 콘칩 하나 남았더라고. 앞으로 땡겨야 할 것 같아.
그러면 여진이 대걸레를 들고 와서 하얀 바닥의 검은 발자국을 훔쳤다. 다른 과자들보다 뒤에 있던 과자를 진열장 앞부분에 닿도록 당겼다. 음료의 로고가 보이게 돌렸다. 그러면 계산대 앞에서 아저씨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계산해줘! 사장님도 아니고. 여진은 아저씨가 올 때마다 장이 꼬이는 것 같았다.
여진이 아저씨의 행동 중 가장 싫어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건 저 아저씨가 편의점 순회공연을 마치고 음료 냉장고 앞에 서 있을 때였다. 아저씨는 커다란 덩치가 어디까지 쪼그라들 수 있는지 온몸으로 표현했다. 큰 다리를 벌려 주저앉고 엉덩이를 바닥까지 내렸다. 길쭉한 등을 둥글게 휘고 머리를 자라처럼 길게 뽑았다. 아저씨가 난쟁이가 되는 그 순간은, 여진의 신경이 가장 곤두서는 시간이었다. 아저씨가 냉장고 문을 열고 술 코너에 쪼그려 앉으면 볼록 거울로도 뭐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진이 알 수 있는 건, 아저씨가 그렇게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다가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오는 것이었다. 걸어오다가 눈이 마주치면 씩 웃었다. 아저씨 턱에 나 있는 수염이 얕게 흔들렸다.
- 아가씨 나이가 스물…… 몇이랬지?
- 20대 초반이에요.
- 한창 좋을 때야. 1년이 아주 소중한 시간이라고.
- 네, 감사합니다. 1,500원입니다. 봉투 담아드릴까요?
- 됐어. 들고 휘적거리면서 가면 돼.
여진은 아저씨가 올 때마다 봉투에 담아 드리느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늘 봉투가 필요 없다고 답했다. 딸랑거리며 문에 달려 있던 종소리가 들렸다. 여진은 아저씨에 관한 건 하나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가 나갔고 여진이 계산대에 내려놓았던 노란 귤을 집어 들었다. 귤의 곰보 자국을 손으로 느끼다가 꼭지가 달려 있던 부분을 손톱으로 깊게 눌렀다. 꼭지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귤은 못생겼어도 내용물이 맛있는데. 저 아저씨는 외관과 내면이 일치하는 것 같았다. 여진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귤껍질이 하나둘 벗겨지면서 귤의 노란 속살을 드러냈다. 아니, 아직 하얀 속옷이 남아 있었다. 여진은 8조각의 귤을 조각조각 나누어 입에 넣었다. 한 조각이 입안에서 터지면서 입천장을 자극했다.
오늘, 아저씨의 점퍼 지퍼는 한 번도 내려간 적이 없었다. 아저씨가 들어오면 가게 안에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도 최소로 낮추었다. 사소한 소음도 놓치지 않으려고 여진의 온 신경이 아저씨를 향했다. 이번에도 지퍼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아저씨는 유유히 사라졌다. 아저씨가 문제인지, 여진 자신의 문제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음료 냉장고의 재고를 책임지는 다른 아르바이트생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몇 달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있는 재고 검사를 하면, 맥주 1L의 재고와 막걸리 재고가 맞지 않았다. 둘 다 사라질 때도 있었고 하나만 사라질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합해서 한 달에 최소 4병씩은 없어졌다. 모든 아르바이트생에게 사장님의 엄명이 떨어졌다.
음료 냉장고는 거울로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사장님의 말씀이 여진의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여진이 가장 의심스러운 건 저 아저씨였다. 아무리 지켜봐도 저 아저씨가 온몸을 웅크려서 확인하기 힘들다고! 마음속의 여진이 외쳤다. 여진은 사장님 앞에서 아저씨에 대해 한 마디도 못했다. 괜한 사람 의심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까 봐 겁났다. 편의점에 존재하는 사각지대가 여진의 눈을 가린 것 같았다. 음료 냉장고와 수직으로 배치된 판매대. 그 판매대와 수평으로 놓인 계산대. 여진이 아무리 지켜보고 싶어도 음료 냉장고, 특히 주류 부분은 다른 진열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음료 냉장고는 수줍게 웅웅거릴 뿐이었다. 웅웅, 웅웅. 탁. 전기가 끊어진 것처럼 편의점 안이 고요해졌고 여진이 귤 씹는 소리만 편의점을 가득 채웠다. 여진의 기분을 바꿔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 안녕하세요.
- 어,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댄디 커트가 제때 들어왔다. 하얀 화선지에 검은 먹이 스며들듯 여진의 무표정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른 의미로 여진의 눈이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남자는 빵, 과자, 라면, 일회용품 등 판매대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참치 캔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유제품 코너로 이동했다. 아디다스 운동화와 갈색 면바지가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검은 패딩 점퍼가 너무 커서 사람이 아니라 옷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옷이 너무 큰지 소매를 자꾸 추켜올렸다. 여진도 괜히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올려봤다. 하얀 얼굴과 갈색 뿔테 안경. 패딩 안에 있는 그의 얼굴은 연예인 지망생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편의점 안의 싸늘한 공기가 여진의 팔을 감싼다. 그가 항상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오늘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아서 여진의 기분이 내려갔다. 그가 초콜릿 우유를 들고 왔고 여진은 소매를 다시 내렸다. 늘 콜라 마시는 모습을 봤는데, 우유라니.
- 계산해주세요. 마일드세븐 하나도 같이 주세요.
- 이거 원플원이에요. 하나 더 가져와 주세요.
오늘은 콜라 안 드시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질문할지 말지 결정하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우유 하나를 더 가져왔다. 질문이 목구멍에 걸려서 침과 함께 다시 삼켜졌다. 여진이 카드를 받아 계산했다. 남자가 우유를 두고 갔다. 전 두 개 필요 없어요. 여진이 두 손으로 우유를 감싸 쥐었다. 손안에서 굴릴수록 귤은 달아지지만, 우유는 미지근해질 뿐이었다.
콜라와 초콜릿 우유의 공통점은 색깔 말고는 없을 것이다. 색도 완전히 똑같진 않으니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자는, 여진이 기억하는 한, 콜라를 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계산대로 다가올 때면 항상 빨간 캔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손님이 두어 명 가게에 있는 날 그를 지켜보면, 계산하자마자 캔 뚜껑을 열어 그 자리에서 한 캔을 비우는 것도 자주 봤다. 그가 캔 뚜껑을 따면 알루미늄의 마찰 소리가 먼저 들렸고 콜라에 가득한 탄산 소리가 뒤이어 고막을 때렸다. 남자는 지체하지 않고 단번에 들이켰다. 탄산을 좋아하지 않는 여진마저도 침 한 번 꼴깍 삼킬 정도로 시원하게 마셨다.
여진은 탄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실 것을 물어보면 우유를 찾는 사람이었다. 특히 하얀 우유와 초콜릿 맛이 진한 우유를 좋아했다. 시중에 파는 초콜릿 우유는 진하지 않아서 밖에서는 하얀 우유만 마셨다. 집에서는 정량의 두세 배 되는 코코아 가루를 우유에 넣었다. 가루가 녹지 않아 전자레인지에 돌려야 할 정도로, 진하다 못해 걸쭉해질 정도로 만들었다. 여진은 만지작거리던 초콜릿 우유갑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맑은 액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젤리가 흔들리듯이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준 초콜릿 우유는, 풍미가 진한 편이었다.
액체를 식도로 넘길 때의 감촉을 한 줄로 배열한다면 우유와 탄산은 양극단에 있을 게 분명했다. 탄산음료를 좋아하는 사람은 우유 특유의 끈적임을 좋아하지 않았고, 우유를 좋아하는 사람은 탄산음료의 자극을 싫어했다. 여진의 주위에는 탄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득했다. 우유가 더 좋다는 여진을 이해하지 못했다. 식도가 자극되는 시원함을 느끼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다. 여진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콜라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 초콜릿 우유라니. 공통점이라도 찾아서 남자를 이해하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 다 속이 시커멓다는 것 말고는 둘이 전혀 다르다는 것만 떠올랐다. 설마, 나 주려고?
지난주 아르바이트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편의점에 있던 손님들은 학원 수업이 끝난 중고등학생이었다. 김밥 냉장고와 라면 진열장 등 편의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김밥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햄버거를 집어 들고 돌아다녔다. 라면 판매대에 학생들이 모여 있으면 도둑질을 작당하는 것 같았다. 여진은 학생들이 제일 싫었다. 그들은 편의점 양 끝에서 서로에게 무얼 먹을 건지 물어봤다. 겨우 네 명뿐인데도 목청껏 외쳐서 가게 안에 음악 소리와 학생들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소음이 커질수록 정신없어서, 학생들이 오기만 하면 음악을 꺼버렸다. 그녀는 누구도 훔칠 수 없도록 볼록 거울과 학생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때 댄디 커트가 여진에게 말 걸었다.
콜라 좋아해요?
아니요, 저는 우유 좋아하는데요.
그때 마음에 여유가 있었으면 콜라 좋아한다고 거짓말했을 텐데. 너무 솔직하게 말한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혹시 지난주에 했던 대화를 남자가 기억해서 초콜릿 우유를 골라 온 건 아닐까. 여진의 마음이 붕 떠올랐다가, 남자가 ‘원 플러스 원’도 모르고 있다는 게 기억났다. 마음은 중력의 법칙에 영향을 받아서 쑥 내려갔다.
*
- 아가씨, 할 만해?
- 저야 그냥 하는 거죠, 뭐…….
또 주말이 왔고, 여진은 아르바이트하러 나왔고, 보기 싫은 막걸리 아저씨도 나타났다. 지난주, 지지난 주와 같은 차림이었다. 눈감고도 말할 수 있는 차림인, 카키색의 야상 점퍼와 카무플라주 패턴의 바지였다. 굳이 지난주와 다른 점을 하나 꼽자면, 머리에 비니를 쓰지 않았다. 아저씨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카락에 달라 붙어있던 물방울이 흩뿌려졌다. 편의점 밖에서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쓰고 오지 않아 야상 점퍼에 빗살무늬처럼 짙게 얼룩져 있었다. 아저씨가 움직이는 대로 하얀 바닥에는 검은 군화 자국이 따라갔다.
아저씨가 이곳에 오는 이유는, 직원 혼자만 근무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20대 초반의 순진해 보이는 얼굴은, 도둑이라면 속여먹기 쉬운 대상일 게 뻔했다. 아무리 여진이 날카롭게 감시한다 하더라도, 작정하고 속이려는 사람을 이길 리가 없다.
여진이는 손님들이랑 친한 것 같네?
사장에게 들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손님이랑 대화하는 것도 좋은데, 로스 안 나게 체크 좀 잘 해줘. 마음속 여진은 사장에게 실컷 대들었다. 사장님, 사과하세요. 기분 나쁘네요. 그거 절 방심하게 하려고 말 거는 거예요. 안 그래도 마크하고 있다고요. 현실의 여진은 고개를 한참 숙이고 있다가 알겠다고 겨우 답했다.
- 예전부터 봤는데 참 기특해. 우리 딸도 좀 나가서 이런 알바하면 얼마나 좋아.
- 아……. 네…….
- 아가씨 하는 거 보면 지각 같은 건 영 안 할 것 같단 말이야. 거기다 이제는 아저씨가 매장 돌아도 아가씨한테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깨끗이 관리하면 사장님이 엄청 예뻐하겠어. 오히려 아저씨가 더럽혔네.
- 괜찮아요.
여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이미 음료 냉장고 앞에 있어서 여진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웅웅하고 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아저씨가 냉장고 문을 열고, 다시 그 큰 덩치를 하나하나 접었다. 여진이 가게 안에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를 줄였다. 아저씨는 난쟁이가 된 상태로 음료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에서 아저씨가 막걸리 한 병을 꺼내 살펴보고, 다른 병을 또 꺼내 살펴봤다. 여진이 바깥을 쳐다보니 부슬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길가에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여진은 계산대에서 나와 음료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바닥이 젖어서 미끄러졌다. 삑.
- 아가씨, 괜찮아?
- 아, 네…….
아저씨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음료 냉장고 옆의 창고 문을 열었다. 오른쪽에 음료 냉장고로 들어가는 문이 또 있었고 정면의 진열대에는 과자나 라면이 정리되어 있었다. 여진은 구석에 세워져 있던 대걸레를 꺼냈다. 창고 문을 닫고 뒤돌자 하얀 바닥에 아저씨가 돌아다닌 만큼 바닥에 검은 얼룩이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편의점 모든 바닥에 발자국이 있었다. 아저씨는 막걸리를 고르고 나면 다른 진열장에 들리지 않고 곧바로 계산대로 왔다. 여진이 아저씨가 걸을 부분만 제외하고 바닥을 닦았다. 여진은 계속 아저씨를 주시했다.
아저씨는 미간을 찌푸려가며 막걸리 주둥이를 검사하고 있었다. 확인이 끝난 막걸리는 음료 냉장고 밖에 세웠다. 이걸로 냉장고 밖에 있는 막걸리는 세 통이 되었다. 아저씨가 냉장고 깊숙이 손을 넣었다. 안쪽에 있던 막걸리까지 꺼내려는 것 같았다. 하나 꺼내서 주둥이를 보고 바깥에 내려놓았다. 다시 냉장고 깊숙이 손을 넣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여진은 결국 한마디 했다.
- 뭘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좋아. 이 정도 목소리면 괜찮아. 여진의 목소리는 그렇게까지 뾰족하지 않았고, 그렇게까지 끝이 올라가지도 않았다. ‘궁금하지 않지만, 내 눈에 보이니 너에게 물어본다는’ 말투였다. 아저씨는 막걸리 두 병을 지금껏 꺼냈던 병들과 다른 곳에 세워두고, 다른 막걸리를 하나하나 냉장고 안에 다시 넣었다. 아저씨의 야상 점퍼는 여전히 목까지 잠겨 있었다.
- 나? 막걸리 제조 날짜 보고 있었어.
아저씨는 으쌰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 앞에 앉을 때는 그 누구보다 느리게 앉았으면서 일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굽어 있던 등이 펴짐과 동시에 접혀 있던 무릎도 곧게 퍼졌다. 양손에 막걸리를 든 거인은 기우뚱하며 계산대로 걸어왔다. 걸음마다 통통 리듬이 담겨 있어서 반주 없는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여진도 계산대 안으로 들어갔다.
- 막걸리는 제조 날짜가 중요해. 안 그러면 써진단 말이지. 인생이 쓴데 술마저 쓴 걸 선택할 필요 없잖아. 그래서 제조 날짜를 보고 있었어.
- 술은 다 똑같은 거 아니에요?
- 전혀 달라. 소주를 마시면 그 쓴맛에 인생을 느끼고 맥주를 마시면 힘든 게 우스워지지.
- 그럼 막걸리는요?
- 막걸리는 소주와 맥주를 마실 때의 느낌을 다 느낄 수 있지. 맥주보단 도수가 높으니 인생을 느끼다가도 쌀의 고소한 맛이 입 안에 퍼지면 인생 별거 아니라고 하는 것 같단 말이야. 아가씨가 마시면 알코올 특유의 맛이 많이 느껴질 거야. 아직 인생 겪어보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아저씨 정도 나이가 되면 단맛만 느껴지지.
- 아……. 네…….
- 무엇보다 다른 술과 다르게 입안에 쩍쩍 맴돌아. 다른 술들도 좋지만, 그 느낌 때문에 막걸리를 제일 좋아하지. 그래, 꼭 우유를 마신 것 같아.
- 우유랑 막걸리가 같을 리가 없잖아요.
- 술 안 좋아하는구나? 그래, 그래. 애기면 모를 수도 있지.
아저씨는 막걸리를 양손에 쥐고 덩실거리며 나갔다. 보슬보슬 내리던 겨울비는 어느새 그쳤고 아저씨가 열고 나간 문에서 찬바람이 편의점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겨울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던 거리가 맑아졌다. 버스와 자동차 몇 대가 지나갔고 사람들은 우산 대신 파카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종종거렸다. 막걸리를 양손에 든 아저씨는 한참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카키색 야상 점퍼와 초록색 병이 이어져서 긴팔원숭이 같았다. 여진은 그 광경을 20초만큼 더 보다가 문을 닫았다.
초록색 계산대 위에는 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저씨가 주고 간 것이었다. 울퉁불퉁하고 상처투성이의 못난 귤. 껍질도 말랑말랑했다. 여진이 귤을 들어 잠시 만지작거렸다. 오래돼서 껍질과 알맹이 사이에 공기가 들어갔겠지. 엄청 시고 맛없을 거야. 여진이 귤을 구석으로 치웠다. 음료 냉장고에서 계산대까지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통로에도 아저씨의 흔적이 거멓게 남아 있었다. 옷을 같은 거 입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분명 똥 밟아도 신발을 안 닦을 거야. 여진은 다른 손님이 오기 전에 대걸레로 발자국을 지워버렸다.
- 저기요, 이거 얼마예요?
- 야. 거기 적혀 있잖아. 뭐하러 물어봐.
- 너 라면 먹을 거냐?
- 아니. 돈 얼마 없어. 그냥 삼각 김밥.
비글 같은 중학생들이 소란피우고 나갔다. 학원 쉬는 시간이 같았는지 평소보다 두 배는 넘는 학생들이 편의점에 들어왔다. 가격을 물어보고, 친구와 사는 걸 맞추려는 목소리가 세 배는 더 커졌다. 계산하겠다고 학생들이 편의점에 길게 줄도 섰다. 분명 여러 사람을 상대했는데 여진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스타일의 남자애와 똑같은 스타일의 여자애만 기억에 남았다. 남자애들은 윗부분을 길게 남기고 아랫부분을 짧게 자른 투블럭 스타일을 했고 여자애들은 머리를 길게 풀어헤쳐서 긴 생머리를 고수했다. 메뚜기 떼들이 미국의 밀밭을 습격하고 나면 이삭 하나도 남지 않듯이, 학생들이 왔다 간 편의점 진열장은 텅 비었다. 남은 흔적은 음식물 먹을 수 있게 마련된 서랍 위에 컵라면 비닐, 라면 수프 가루, 국물 자국 정도였다. 여진은 손걸레를 들고 정리했다.
- 안녕하세요. 오늘……. 물건이 별로 없네요?
- 아, 어서 오세요! 방금 학생들이 와서요…….
너무나도 지쳤을 때 좋아하는 연예인이 애교부리는 영상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일까. 댄디커트가 들어왔다. 여진은 손걸레를 들고 있는 게 괜히 부끄러워서 내려놓고 진열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하필이면 여진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쪽부터 살폈다. 10분만, 아니 5분만 늦게 왔으면 정리를 더 깔끔히 했을 텐데. 민망한 마음에, 걸레 만지느라 차가워진 손으로 달아오른 볼을 꾹 눌렀다. 댄디 커트가 계산대 왼쪽에 있는 우유 냉장고에서 머무르다가 음료 냉장고 유리문을 두드리며 마실 것을 고르고 있었다. 남자는 오늘도 커다란 검은 패딩을 입고 있었다. 춥지 않은지 패딩 지퍼를 반 정도 열어 놨다.
- 학생들이 많이 왔다 갔어요?
- 네……. 오고 나면 정신이 없더라고요.
여진이 과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집었다가 내려놨는지 다섯 번째 줄에 있어야 할 과자가 두 번째 줄에 있었다. 판매대 안쪽에 있는 과자를 앞으로 당겨서 진열장에 꽉 찬 것처럼 바꾸고, 다른 곳에 있는 과자를 제자리에 놓았다. 라면 판매대는 과자 코너와 달리 텅 비었다. 남자가 음료 냉장고 문을 열었는지 찬바람이 여진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여진은 몸을 한 번 떨고선 라면 진열장도 정리했다. 몇 개 안 남은 라면들을 진열장 앞으로 당겨 놓으면 일이 끝났다.
- 오늘 진짜 추운 것 같아요. 비가 와서 그런가. 어, 이 음료 새로 들어왔네요?
- 어느 거요? 아, 네. 그래서 지금 2+1 행사하고 있어요.
음료 냉장고로 이동하자 남자가 하늘색 캔 하나를 들어 보였다. 블루 하와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자는 들고 있던 음료를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제자리에 놓고 콜라 한 캔을 꺼냈다. 여진은 그 모습이 좋았다. 검은 패딩에 하늘색보단 빨간색이 잘 어울렸다. 어느새 패딩 지퍼를 올렸는지, 남자의 작은 얼굴이 겉옷에 푹 파묻혀 있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다.
- 남자 친구는 있어요?
- 아뇨, 없어요.
남자가 콜라 두 캔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빨간 캔은 구겨진 부분도 없이 계산대 위에 우뚝 솟았다. 마음속 여진은 지난주와 반대로 우유는 안 사시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여자 친구의 유무도 알고 싶었다. 현실의 여진은 남자의 질문에 대답만 겨우 하고 묵묵히 캔의 바코드를 스캔했다. 남자가 현금을 내밀었다. 여자 친구 있냐고 물어볼걸. 남자가 현금영수증을 사양했다. 남자는 편의점을 나갈 때까지 여진에게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역시 콜라와 우유는 동시에 좋아할 수 없어. 여진이 그렇게 믿었다.
*
- 줄 서 주시면 순서대로 계산해드리겠습니다!
여진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일요일인 오늘은 어제보다 손님이 더 많았다. 막걸리 아저씨와 댄디 커트를 발견했지만 인사할 틈이 없었다. 손님도 많은데 막걸리 아저씨는 늘 그랬듯이 음료 냉장고 앞에 주저앉았다. 손님들이 큰 덩치의 아저씨를 볼 때마다 놀랐고, 막걸리를 꺼내놓으며 자리 차지하는 아저씨를 흘낏흘낏 쳐다봤다. 여진은 아저씨를 감시하고 싶었지만, 계산대로 손님이 계속 몰려왔다. 우유 담는 초록색 플라스틱 박스를 가져와서 올라섰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개미떼가 음식물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았다. 매장 안의 사람을 주시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여진은 아저씨가 점퍼 지퍼를 내렸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손님이 많네. 고생해!
계산대 앞에서 아저씨는 턱수염을 꿈틀거리며 웃고 있었고, 막걸리 세 병을 올려놨다. 봉지가 필요하냐는 여진의 물음에 주머니에 막걸리를 쑥쑥 집어넣을 뿐이었다.
댄디 커트도 그 시간에 왔다. 오늘도 커다란 검은 패딩을 입고 있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플라스틱 박스 위에 있던 여진은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계산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박스 위에서 내려왔다. 빠르게 계산하려고 물건과 포스 단말기만 번갈아가며 봤다. 물건을 스캔하고 기계에 찍힌 금액을 말하면, 손님이 계산대에 돈을 던졌다. 여진이 고개를 들 때는 콜라 캔을 스캔할 때였다.
오늘 바쁘시네요.
댄디커트는 패딩 점퍼의 지퍼를 턱 아래까지 올렸다. 짧은 한마디를 건넨 후 콜라 한 캔을 손에 쥐고 나갔다.
손님이 빠져나간 편의점 정리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음료 냉장고에서 로고가 보이게 캔을 돌리고 있을 때 사장이 들어 왔다. 사장은 창고로 들어갔고 여진은 다시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산대 한쪽 구석에 여진이 어제 놨던 귤 하나가 아직도 있었다. 오늘의 귤도 어제만큼 말랑하고 못생겼다. 창고에서 나온 사장이 여진에게 툭 내뱉었다.
- 여진아, 범인 누군지 알았다.
- 누군데요?
- 내가 너보고 손님이랑 적당히 친하라고 그랬지? 난 처음에 니가 그 사람이랑 작당한 건 줄 알았잖아.
- 도대체 누군데 그래요?
- 그놈, 아주 미친놈이더라고. 알바생 혼자 있는 편의점만 노렸어. 일부러 의심 안 받으려고 말도 걸었대. 너도 CCTV로 보니까 당한 것 같아서 별말 안 한다만, 다음부턴 조심해라. 니 시간대에만 로스 발생한 거 아니니 걱정 말고. 너 말고 평일에 혼자 있는 애가 당했어.
사장이 내민 종이에 CCTV 화면에서 캡처한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흑백이지만 훔치는 동작이 선명하게 나와 있었다. 음료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1L 페트병을 점퍼 안에 넣고 있는 장면이었다. 한 장 더 넘겼다. 여진이 일하는 편의점과 다른 구조지만, 사진 속의 점퍼를 입은 사람은 음료 냉장고 문을 열고 있었다. 가슴 지퍼를 열고 막걸리 병으로 추정되는 걸 넣고 있었다. 여진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 정말 이 사람이에요?
- 그래. 그동안 어떻게 했는지 우리 CCTV에는 안 걸렸는데, 세 블록 떨어진 편의점에는 찍혔더라.
- 그렇군요…….
사진은 흑백이지만,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을 바로 알아봤다. 검은 패딩 점퍼에 작은 얼굴. 여진을 설레게 하던 귀여운, 귀여웠던 댄디 커트였다. 체구에 비해 큰 패딩을 입었던 건 전부……. 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진을 계속 봤다.
사장은 사진을 편의점 유리 벽에 붙였다. 경고의 의미였다. 여진이 사장을 도와 박스 테이프를 잘랐다. 남자가 편의점에서 맥주와 막걸리를 품는 장면이 전시되었다. 여진은 계산대 구석의 귤을 봤다. 손을 뻗어 만지작거리자, 까기 편할 정도로 말랑말랑했다. 꼭지 부분을 눌러서 벗겨내자 귤의 노란 속살과 하얀 줄기가 드러났다. 손으로 한 조각을 뜯어내 입 안에 던졌다. 입속에서 귤 알갱이가 톡 터지고, 지난주의 귤보다 다디단 귤즙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 귤이 참 달아요. 귤껍질은 이렇게 못생겼는데.
- 귤껍질이 예뻐 봤자 뭐에 쓰냐? 다 약품 처리일 텐데. 맛만 좋으면 됐지.
여진은 귤을 우물거렸다. 남은 네 조각도 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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