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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청소년온라인백일장 예심통과 작품입니다-구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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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461회 작성일 15-08-19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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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편지

 

 

시원한 밤공기에 반팔만 한 장 입고 나온 걸 또 후회한다. 꼭 이런 밤이었다. 이렇게, 꼭 이맘 때, 어슴푸레한 기억 속에선 때가 탄 빨간 보도블럭 위에 네가 서 있다. 탄산 마신 것처럼 속이 싸하고 시원하다. 꼭 그게 아니어도 무언가 붙잡고 추억할 만한 게 이 어둠속에서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이제 막 다 큰 것 같았고 세상이 좁고 어둡게만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에도 너와 나는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누구보다 맑은 목소리로 꿈을 이야기하고 위로했다. 시끄러운 여자 아이들 세계와 떨어진 우리만의 세상이 있었다. 가식과 위선 섞인 웃음소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있었다. 그럴 때만은 학교가 단 하나뿐인 낙원이었다. 나른한 불빛에 우리 둘 만 있어도, 싸늘한 바람이 살갗을 스쳐도 모든 게 행복이었고 모든 게 잘 될 것만 같았다.

파도가 모래성 같은 꿈들을 집어삼킬 때, 바람이 무섭게 회오리 칠 때 부둥켜안을 사람이 있었다. 구름이 뭉게뭉게 모이다 비로 내리면, 비 올 때 부스스 떠버리는 내 고수머리처럼, 우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도서실 근처를 서성였고. 뾰루지가 생겼을 때처럼 절망스러운 일은 없었지. 지금도 나는 웃는 삐에로들이 등 뒤에 더러운 손을 몰래 닦을 때면 우리 둘이 서 있는 어떤 곳이든 만들어졌던 아늑한 그 공간을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말없이도 우리는 어디서 모여야 하는지를 알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서늘한 바람이 삭혀 주면, 돌계단 어디선가 꽃향기가 난다. 바람이 시간이 어떻게 해 주면 좋겠다, 초조하게 시계만 바라보다가. 그러다가 발로 모래를 모아 긁적긁적 장난질도 해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지나가는 사람이 너인 것 같다가, 너로 보였다가, 너가 아니었다가.. 시를 온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음을 너는 알았을까. 기다림에 익숙해 질 때 즈음 내 어깨를 힘차게 두드리는 손길. 나는 그게 마냥 좋았다. 해처럼 밝은 웃음소리와 웃을 때 예쁘게 패는 보조개. 참새가 노래하듯 재잘재잘 이야기하던 너의 목소리.

아픔을 이야기하는 너의 눈빛은 저 푸른 바다보다도 짙은 푸른색이었다. 슬픔은 주체할 수 없어 슬픈 노래만 들어도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 웃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밝고 드높게 하늘을 향해 웃었던 예쁜 모습. 모든 세상이 흑백일지라도, 너와 내가 함께이면 빛나는 요술 코트를 입고 돌아다녔다.

슬프게도 역시 영원한 건 없었다. 사랑은 집착으로, 도란도란 이야기들은 당연시 여겨지는 익숙함으로 변하던 무서운 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될 수 없었던 것,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떠올려 본다. 용맹한 사자와는 거리가 멀고, 우아한 기린이라기엔 너무 초라한 내 모습.

그 때 우리는 멈추지 않는 두 마리 쇠똥구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끝도 보이지 않는 길에서 꾸준하게 걸어가던 너와 나가 만나, 끊임없이 도전하고, 서로에게 하소연하고 위로 받는. 서로에게 커다른 해결의 열쇠를 쥐어줄 수는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너와 내가 서로 다른 곳에서라도, 끊임없이 굴러갔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저편에서 네 모습을 봤을 때엔 낯선 모습에 우울해졌다. 유치원 때 만난 친구를 처음으로 다시 보는 것처럼 반갑지만 서운한 기분이랄까. 벌써 저 애는 이 세상에 적응을 했구나, 나는 아직도 서툰데. 괜히 부러운 느낌도 들고 그 많은 시간동안 나는 슬픔에만 취해 있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이별 후에도 너는 나에게 또 다른 힘이 되는구나, 반갑고 마음 한 구석이 시려왔다.

바람이 시간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까. 어린 마음에 너무 많은 걸 바랐던 나. 힘들어 했던 우리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긴다. 그 때엔 내 감정을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너 또한 나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 나는 너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솔직했더라면, 좀 더 이해했더라면. 어디선가 또 향기로운 웃음을 짓고 있을 너를 생각하며 되돌아 다시 걷는, 커다란 돌계단. 내 맘 한구석에는 항상 네가 있다. 그게 후회든, 자랑이든, 사랑이든. 한 때 나의 나무였던 너, 너의 나무였던 나.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빛날 때가 있다. 말보다도 더 크고 말보다도 자세한 것이 있다. 구구절절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도, 마음이 사람에게 닿을 때가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나의 고마움이, 사랑이 너에게 행복으로 닿기를 바라며.

보내지 않은 편지는 이제 모서리마저 닳고 달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묻어나는 우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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