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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청소년온라인백일장 예심통과 작품입니다-이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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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365회 작성일 15-08-19 12:15

본문

 

 

「나 수시 합격했어.」

휴대폰에서 띠롱! 하는 소리와 함께 꺽다리의 문자가 왔다. 어디 대학에 들어갔는지 그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일단 축하한다고 답장했다.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대학은 17살의 나에게 있어서 백만 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이었다. 꺽다리는 내 답장에 연속적으로 문자를 쏘아댔다. 휴대폰 너머로 분명 실실 웃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낮에 문제집을 마주하고 밤에는 나와 살을 맞대었다. 내가 팔을 꾹꾹 누르는 동안 그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색한 신음을 냈다.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신음을 생각하지는 않고 그는 관계가 끝나면 늘 내 신음에 대해 주절주절 불평했다.

그는 툴툴거리며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이야기를 종종 해주었다. 언제나 그녀는 가짜 신음을 내서 꺽다리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었다. 그는 신음을 만족의 척도로 생각했다.

“무슨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내가 피식 비웃자 꺽다리는 내 팔을 한 대 때렸다.

「야. 오늘 할래?」

꺽다리의 문자가 날아왔다.

「오늘 학교 안가요?」

「대학 합격했는데 뭘 학교를 가? 오히려 민폐인걸. 지금 나올래?」

「학교 가야 하는데.」

「니가 언제부터 학교를 꼬박꼬박 갔어? 신논현역 3번출구 앞에서 만나.」

오늘은 꺽다리가 신음을 좀 더 자연스럽게 내길 내심 바라며 챙기던 책가방을 침대에 내팽개쳤다. 어차피 집에 할아버지와 나 뿐이었다. 빼꼼 열린 방문 틈새로 할아버지가 보였다. 구질구질해. 속으로 중얼거리곤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가 하늘로 먼저 올라간 후, 엄마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저, 아버님, 그이 사업자금이 좀 부족해요.

할아버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침상을 톡톡 쳤다. 할아버지는 좁쌀만 한 눈을 겨우 뜨고 내게 물었다.

“의선아. 이 할애비랑 같이 살고 싶니?“

말꼬리를 흐리자 엄마는 발로 내 발등을 꾹 눌렀다.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내 대답과 동시에 엄마와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지는 벽장 위에 놓인 할머니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할머니가 폐렴으로 세상을 뜨신 이후부터, 할아버지는 혼자였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은 깔깔거리며 술잔을 돌렸다.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바람을 피운 적 없었으며 월급봉투도 제때 가져다주었다.

친척들은 할머니께서 좋게 가셨다며 호호 웃었다. 마치 브레맨 음악단의 동물소리를 연상시키는 취객들의 노래에 내 표정은 굳어졌다. 형식적인 곡소리와 함께 고스톱이 벌어졌다. 한구석에서 두셋은 트럼프로 도둑잡기게임을 했다. 할아버지는 혼자서 영정사진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엄마는 친척들 틈에 껴있었다.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은 짐짝을 바라보는 그것과 같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더는 바라볼 자신이 없어 밖으로 나왔다. 팩소주를 꺼내려고 가방을 뒤질 때, 아빠는 옆에서 기침을 하며 내 옆에 서서 맥주캔을 흔들었다.

그는 화분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향해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맥주캔을 던졌다. 맥주캔이 빙글빙글 돌며 쓰레기통의 테두리를 구르다 화분으로 떨어졌다. 아빠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맥주캔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거 안 주을거야?”

내가 물었다. 아빠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곤 장례식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동안 찌그러진 맥주캔에 눈길을 두었다.

「D 모텔 503호.」

꺽다리의 문자가 왔다. 지나가는 개인택시를 한 대 붙잡았다.

“이 시간에 학생이 타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봐?”

택시기사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꺽다리는 침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는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셨다. 독한 향이 입 안에서 확 퍼졌다.

그는 지거국이라는 대학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지거국대라는 이름은 난생처음 들어보았다. 알고 보니 지거국은 지방거점국립대학교의 줄임말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한 곳이 지거국이라니. 옆에서 깐죽거리자 그는 덮고 있던 이불을 확 빼앗았다. 그는 좋은 인생을 얻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덧붙였다. 인생을 ‘얻는다.’ 이 한마디가 마음에 콱 박혔다. 인생을 얻는다니, 문득 인생을 돈으로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지 쓸데없는 상상이 떠올랐다.

더 이상 꺽다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로지 코고는 소리만 들렸다. 끽해야 오 분밖에 안 눌렀는데. 그의 팔을 좀 더 꾹꾹 누르고 싶었다. 깨우려고 팔을 건드렸지만 코고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잠들었다. 에이 시시해.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정신은 맑았다.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는다. 볼륨을 영으로 줄인 채 텔레비전을 켰다. 생판 처음 본 영화가 방영 중이었다. 내용은 신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억지로 시청자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흐르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배우들과 감독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텔레비전을 다시 꺼버렸다. 꺽다리와 등을 맞대었다. 차갑다.

꺽다리의 이가는 소리가 방을 타고 돌아다녔다. 나는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코고는 소리와 이가는 소리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오늘 꺽다리의 상태가 왜 이렇게 불량일까. 꺽다리를 흔들어 깨우자 그의 조그만 눈구멍이 열렸다.

“아, 스트레스 받아 뒤지겠네. 이 좀 그만 갈아!”

그는 입맛을 다시곤 다시 잠들었다. 더 이상 코고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안심했던 찰나 또다시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갈이 때문에 멀리서 슬금슬금 다가오던 마지막 잠이 땅으로 꺼졌다. 미친 꺽다리. 화를 씩씩 내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샴푸에서 싱그러운 민트향이 솔솔 났다.

할아버지도 나처럼 민트향을 좋아했다. 특히 페퍼민트 차를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시들시들한 방에서 시들시들한 몸뚱이로 살아갔다. 왠지 할아버지의 정신까지 썩은 무말랭이처럼 말라붙었을 듯 했다. 엄마와 아빠 둘 중 한사람이 집에 있을 경우 나는 꼼짝없이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해야만 했다. 귀찮다고 방에 쏠랑 들어가 버리면 한 달치 용돈이 날아갔다. 할아버지는 내 유일한 돈줄이었다. 나는 툴툴거리며 할아버지에게 페퍼민트 차를 대령했다. 페퍼민트 차를 마시면 할아버지의 쪼글쪼글한 영혼이 잠깐이나마 활짝 펴지기라도 하는 걸까? 할아버지가 엄마의 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던 날. 그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점점 멀어져 더 이상 집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도 할아버지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에게는 저 집에 그냥 살았을 때가 더 좋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백미러로 보이는 욕심이 더덕더덕 붙은 눈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아까 식당에서 먹은 된장찌개가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살게 될 집을 보곤 얼굴을 찌푸렸다. 창고방의 짐을 안방으로 밀어버리고 할아버지가 주무실 매트리스를 깔았다. 처음에 엄마는 할아버지의 수발을 들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엄마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한 달이 지난 후에는 할아버지의 방에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할아버지를 길가의 돌덩이 보듯이 대했다. 할아버지가 무엇을 해도, 어디론가 가버려도 엄마는 끄덕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제나 쇼핑을 갔다 와도 엄마의 쇼핑백 속에 할아버지를 위한 물건은 별로 없었다. 할아버지가 입고 있는 옷들은 죄다 벼룩시장에서 산 싸구려였다. 엄마는 언제나 무표정이었다. 엄마는 일 때문에 집에 거의 오지 않았고, 아빠는 간당간당한 사업 때문에 1~2주일에 한번 들어올까 말까였다. 아빠의 사업이 그나마 잘 풀렸다면 엄마의 독기가 조금이라도 풀렸을 텐데. 아빠의 사업은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고 찬란한 시절은 도저히 오지 않을 듯 했다. 사업이 기울수록 엄마가 집에 들어오는 횟수는 줄었다. 엄마와 아빠가 더 오래 집을 비울수록 나는 더 자주 모텔에 갔다. 아주 가끔 엄마, 아빠, 할아버지가 한집에 있을 때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았다. 엄마의 탐욕스러운 눈빛과 할아버지의 주눅 든 태도. 그 사이에 끼인 내 가슴은 바싹 말라갔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기어오면 할아버지는 쪼글쪼글한 모습으로 방문을 빼꼼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와 아빠는 일 때문에 툭하면 집을 비웠고 할아버지와 나만 싸한 집을 지켰다. 밤에는 할아버지가 거실에 나와 집을 지키며 나를 기다렸고 낮이 되면 할아버지는 시들시들한 방안으로 들어가고 내가 거실에서 집을 지켰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검버섯이 다닥다닥 피어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검버섯이 적었는데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훨씬 많아진 것 같았다. 그는 연약한 나비날개처럼 꽉 잡으면 바스락하고 산산조각날 듯 했다. 차라리 한숨대신 화라도 버럭 내시면 좋으련만. 오히려 한숨은 나를 얼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창고방문이, 아니 할아버지의 방문이 닫힐 때까지 나는 조심스럽게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을 옴싹달싹 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할아버지의 체구는 아빠보다 훨씬 작았지만 이상하게 자꾸 위축이 되었다. 몸을 수그리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내 가방 속에 구겨진 옷들에 묻은 비릿함을 할아버지가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라며.

“할아버지께 잘해드려. 힘드시겠네.”

나의 집안 사정을 들은 꺽다리가 말했다.

“지긋지긋해.”

꺽다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독한 담배 때문에 목구멍이 바닷바람에 말라가는 오징어처럼 쪼글쪼글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몸 안에 간을 달고 다니듯 담배를 어디에나 지니고 다녔다. 죽어가는 시늉을 하자 꺽다리는 깔깔거렸다. 내 과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배를 줄곧 피워댔다. 꺽다리의 팔을 붙잡고 담배를 빼앗았다. 꺽다리는 툴툴거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싸한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꺽다리와 만나면서 셀 수 없는 침묵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엄쳤지만 지금 흐르는 침묵만큼은 헤엄치고 싶지 않았다.

쿠션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일개 모텔방이 할아버지가 지내는 게딱지같은 방보다 더 좋다니. 어쩐지 서글펐다. 꺽다리는 아무 말도 없이 다리를 삐딱하게 흔들었다. 가무잡잡한 살도 덩달아 미세하게 출렁거렸다.

“내년에는 자주 보기 힘들 거야. 의선아.”

그는 오랜만에 내 이름을 불렀다. 어쩐지 몇 백 마리의 개미들이 내 다리를 기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는 시트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부터 기숙사로 옮겨?”

“내 년 초 정도.”

“밤마다 심심하겠네. 옆에 같이 있어줄 사람이 없으니.”

그는 갑자기 시트를 확 걷었다. 찬기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는 내 다리를 세게 주물렀다. 아파. 내 말에 그는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구석구석 눌렀다. 웬일로 꺽다리는 내 신음이 어색하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학교에 오면 꼭 온 몸이 쑤셨다. 뭐라도 책상에 펴놓아야 할 것 같아서 공책을 펼쳤다. 수업을 하러 교실로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담임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생들은 나를 전학생으로 착각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내 존재감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반대로 아이들 사이에선 미친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들은 나를 헌터라고 불렀다. 가리지 않고 남자들을 낚아채는 사냥꾼.

엄마는 내가 학교에 잘 다니는지 의심했지만 그녀는 집에 있는 날보다 집을 비우는 날이 훨씬 많았다. 그녀의 의심레이더에 걸린 순간은 거의 없었다.

수업내용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칠판에 쓰여있는 복잡한 수식들을 보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학교는 내가 관심 없는 분야까지 내밀어 공부하라고 강요했다. 이차함수와 벤다이어그램 따위가 대체 왜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비실용적인 것들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나마 국어, 영어 시간에는 집중하고 들었지만 나머지 과목 시간을 꾸벅 졸거나 종종 땡땡이를 쳤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교과서에 적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아이는 수업을 듣지 않고 학원숙제를 하는 듯 했다. 두꺼운 책 안에는 영어와 숫자들로 가득했다.

“무슨 책이야?”

내가 묻자 여자애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곤 책표지를 보여주었다. 큼지막한 글씨로 <수학의 정석>이라고 찍혀있었다. 어쩐지 홀로 교실 안을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함께 교실에 박혀있는 아이들은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시계를 힐끔 보았다. 쉬는 시간 끝나기 딱 오 분 전. 나는 가방을 챙기고 교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막상 학교에서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오늘은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라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릴 수도 없었다. 분명 왜 이렇게 일찍 집에 들어왔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햄버거가게에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가게 앞으로 나오라는 문자를 보냈다. 정확히 20분 뒤 꺽다리는 가게 앞으로 나왔다.

“여기서 뭐해?”

꺽다리가 실실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까딱거렸다.

“학교 안 갔어?”

내가 묻자 꺽다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영화나 같이 보자.”

버스를 타고 번화가 주변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언제나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표정을 지으며 지긋지긋한 양복을 입고 지긋지긋한 버스를 탔다. 화장실로 들어가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이 시간대에 교복입고 돌아다니기 참 눈치가 보였다. 근처 영화관에서 전단지를 마구 나누어주었다. 몇몇 사람들은 전단지를 받자마자 바닥에 던져버렸다. 포스터를 쭉 둘러보니 하나같이 재미없을 것 같은 영화들뿐이었다. 배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났다. 꺽다리는 나를 보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꺽다리는 내게 담배를 내밀었다.

“그쪽이나 많이 피지.”

꺽다리는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모든 번화가가 그렇듯, 옆구리에는 골목을 감추고 있었다. 우리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노래방간판들로 가득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몇몇 식당들은 기지개를 펴고 영업 중이었다. 조그마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난로를 만지작거렸다. 꺽다리가 할머니에게 배시시 웃자 노인네는 익숙한 듯 무표정으로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단골이야?”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된장찌개 하나. 계란말이 하나. 공기밥 두 개. 소주 두병. 할머니는 주방을 향해 꺽다리의 주문을 외쳤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직장인들이었다. 지금쯤 점심시간이니 다른 식당도 회사원으로 바글바글하고 복잡하겠지. 학생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도 있었다.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애쓴 것 같았지만 어설퍼보였다.

구수한 된장찌개를 먹으며 꺽다리와 나는 갈수록 처음에 어깨동무를 하다가 손이 점점 내려가 나중에는 서로의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꺽다리는 사이다를 몇 병 더 시켰다. 그는 물컵에 소주와 사이다를 4:6 비율로 따랐다.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한 번에 들이마셨다. 크. 꺽다리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목구멍이 아리고 기침이 나왔다. 밥공기를 싹싹 비우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별로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우리가 할 만한 건 별로 없었다. 놀이공원으로 놀러가기엔 내 용돈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모텔에 가긴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낮부터 몸에 비린내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꺽다리는 액션영화포스터를 가리켰다.

평일이라 그런지 영화관은 한산했다. 관람석을 채운 사람은 우리 두사람 뿐이었다. 이상하게 벌써 졸음이 쏟아졌다. 팝콘을 아작아작 씹으며 아무 기대도 없이 영화를 봤다. 120분은 정말 느리게 지나갔다. 좌석이 상당히 편해 정신없이 잠들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잠에서 깨어났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영화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멍하니 홀 안에 낮아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3시가 되자 대학생들이 영화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뭐하지?”

동시에 서로에게 물었다.

“영화나 한 편 더 때릴래?”

“무슨 영화 볼래. ”

영화 브로마이드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치 맛없는 음식들을 고르는 느낌이었다. 그 중 그나마 제일 덜 맛없는 음식 고르기. 구석에 쳐박힌 공포영화 브로마이드를 가리켰다. 공포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우리는 비명을 한번도 지르지 않았다. 무서워하면서 상대에게 안기지도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주인공들이 귀신에게 시달리는 것을 구경했다. 공포영화를 보면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배우들이 백날 연기를 해봤자 죄다 브라운관이나 스크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현실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초반부는 그나마 흥미로웠지만 중반부로 갈수록 점점 지루해졌다. 하품이 계속 나왔다. 꺽다리와 나는 아예 영화를 보지 않고 팝콘 먹기에 집중했다. 영화를 보러온 건지 팝콘을 먹으러 온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우리 영화 끝나고 모텔 갈 거야?”

“오늘 모텔안가. 한동안 못 볼 거야. 내일 아침 떠나게 됐어. 아버지가 적응도 할 겸 미리가 가래.”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그에게 팝콘 상자를 건넸다. 그는 팝콘상자를 내려다보곤 손을 저었다.

“며칠간 여행 가?”

“기숙사로 들어갈 때까지. 돈은 아버지가 대주셔.”

그는 내 허벅지를 간질렀다. 나도 모르게 바보같이 웃음을 흘렸다. 그의 팔을 간질이려고 한쪽 소매를 올렸다. 그의 팔위에 붉고 푸르스름한 멍이 웅크리고 있었다.

“누구랑 싸웠어?”

“아버지랑.”

그는 거실에 나오면 온 몸이 지글지글 튀겨지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지글지글 튀겨질 정도면 엄청 뜨겁겠네. 막 진물도 나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상황은 그와 반대였다. 우리 집은 아무리 난로를 틀어도 추웠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언제나 으슬으슬 추웠다. 아파서 콜록거리며 침대에 박혀있어도 아무도 내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할아버지만 내 방 앞을 기웃거리며 내 얼굴색을 살폈다. 엄마에게 아프다고 문자를 보내면 <어디 한두 번 아프냐? 약 먹고 자라.> 같은 참 친절한 내용의 답장이 왔고, 아빠에게 문자를 보내면 답장조차 오지 않았다.

아침 8시. 고속버스터미널. 그는 내일 배웅하러 올 거냐고 김칫국을 마셨다. 갈 생각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학교 빠지지 마.”

“닌 성실하게 다녔냐?”

“적어도 너처럼 인생 말아먹은 사람처럼 굴진 않았는데?”

우리는 서로의 밑바닥이 어딘지 잘 알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날게요. 재미없어요. 오후 4시 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창문에 머리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퇴근시간대치곤 애매모호해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꺽다리의 여행발표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이상하게 온몸이 시렸다. 한동안 꺽다리를 못 보다니.

홍대의 헌책방에서 꺽다리를 처음 만났다. 구하기 힘든 희귀본을 여기서 가끔 발견했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미 소문이 난 가게였다. 가끔씩 희귀한 레코드판도 들어와 소규모 경매가 열리기도 했다. 이걸 어디서 구한건지 참 신기했다. 아무리 물어봐도 주인은 빙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더를 켜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함께 놀 남자가 있는지, 촉을 세워 살폈다. 짤랑. 현관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남고생 한명이 들어왔다. 팔다리가 얇고 길쭉길쭉했다. 한 마리의 통거미가 서점 안을 어기적어기적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얼굴은 어쩐지 마귀할멈을 닮았다. 신은 분명 그를 만들 때 팔다리는 열심히 만들곤 얼굴은 대충 만든 것이 분명했다. 마귀할멈을 닮은 남고생은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가 쓴 소설을 집었다.

“그거 안사는 게 좋을 걸요?”

꺽다리 남고생은 조금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거 번역본 개구려요. 메이저 출판사에서 곧 번역본 낸다는데. 그냥 기다렸다가 신간사세요.”

그는 피식 웃었다. 그의 옷에 베인 담배연기 때문에 어쩐지 불쾌했다. 오늘 시간 있니. 그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아무 말도 없이 모텔로 갔다.

“할머니는 오징어처럼 말라붙어 쓰러지셨어. 엄마아빠는 무덤덤하게 할머니장례를 치렀고. 속 시원해.”

꺽다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속 시원한 게 아니라 오징어처럼 변한 할머니를 보고 슬펐겠죠.”

홧김에 내뱉은 나의 말로 갑자기 분위기는 싸해졌다. 그는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눈길을 피했다.

“음.....”

그는 담배를 한 개비 태운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

역터미널에서 두리번거리며 꺽다리를 찾았다. 여기야. 그가 소리쳤다.

“여기야. 여기!”

꺽다리가 손을 흔들었다. 덩달아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나 배웅하러 나왔네?”

그는 배낭에서 작은 선물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로 그렇게 깊은 사이였나요?”

“그냥 받아.”

선물상자를 귀에 대고 흔들어보았다. 가벼운 무언가가 상자 안에서 통통 튀었다.

“핸드크림이야. 손 많이 텄더라. 야, 이제 어디 싸돌아다니지 말고 학교에 좀 박혀있어라.”

그는 버스에 올라탔다. 창문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꺽다리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서로에게 계속 손을 흔들었다. 버스는 매연을 뿜어내며 출발했다.

“안녕, 꺽다리.”

중얼거리며 더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야에서 버스가 완전히 사라지자 내 입에서 미묘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텅 빈 두 눈이 자꾸 생각났다. 눈물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꺽꺽거리며 울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또다시 외출을 한 듯 집에 없었다. 엄마의 말없는 무표정과 아빠의 얼간이 같은 모습을 보는 것보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게 훨씬 나았다. 할아버지는 슬금슬금 들어온 나를 보곤 얕은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탁했다. 우리 집에 온 순간부터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신다면 통곡을 할 것 같았다. 새장 안에 갇힌 할아버지를 풀어드리고 싶었다. 한강 위를 빙빙 날아다니는 새처럼, 할아버지를 자유롭게 하고 싶었다. 적어도 시골집에서 보였던 그 생기는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어흠어흠 헛기침을 하며 다시 곰팡내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고추냉이를 잔뜩 먹은 듯 코끝이 찡했다. 뜨거운 액체가 또다시 떨어졌다. 안방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쪽팔리게. 시발. 욕을 할수록 눈물은 더 빠르게 흘렀다. 내 머릿속에 꽂힌 할아버지의 한마디가 계속 머리 위를 맴맴 맴돌았다. 할 수만 있다면 꺽다리가 내 옆에 있던 그 한 달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누군가 그 한 달 동안의 밤을 관찰했다면 내게 발랑까진 짓이라고 따박따박 따질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다. 꺽다리가 옆에 있었던 그 순간을 다시 붙들고 싶었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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