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부
제6회 청소년온라인백일장 예심통과 작품입니다-권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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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젖지 않는 일기장
구겨진 가정통신문처럼 잿빛으로 흐릿한 하늘에
까만 지우개 가루 같은 새떼들이 날아가고 있어
창밖에서 원망을 동반한 호우가 쏟아지면
잠잠하던 지난날을 헤집어 태풍의 이름을 짓지
일부러 순한 이름으로 지었다던 출생의 비밀
이왕이면 사나운 맹수의 이름이면 좋았을걸 그랬어
튤립처럼 뒤집어진 우산을 쓰고 학교로 가는 길
커피우유 같은 흙탕물에 작아진 욕조를 띄우고
비눗방울 속 무지개가 뜨는 곳을 찾아 흘러가고 싶은데
학교는 왜 오르막에 있을까 발목에만 물이 차서 슬픈 아침
눈부시게 하얀 체육복 가슴팍에 새겨진 돌고래가
뙤약볕에 말라 죽어가고 있어 비릿한 흰 우유를 먹어서일까
키가 큰 짝꿍의 보라색 리코더에서 흘러나오는 침처럼
항상 찝찝하고 흥건한 물빛이 고이는 교실에 앉아
빠르게 쏟아지는 빗발의 획순을 따라 받아쓰기를 하지
창문 너머로 동동 떠다니는 주름들은 너무도 낯설어
사라진 계절을 찾아 창밖을 두리번대는 동안
무거워진 처마를 타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장마
우기를 지나온 유년이 복도를 따라 북상하고 있어
별빛이 익어가는 장독
메주 같은 토담을 타고 자라나는 넝쿨을 따라
향긋하게 익어가는 내 유년의 키가 자라나던 시절
할머니는 뭉뚝한 손가락으로 반짝이는 별을 따다가
불린 콩처럼 반드러운 얼굴에 지장을 찍듯 붙여두셨다
이른 이별에 손짓하는 아궁이 불빛이 사라지면
어둠을 배웅하는 뭇별들이 시린 한기를 메우던 창문
할머니가 항아리 속에 넣어둔 별빛들을 모두 건져내자
깊은 밤이 간장처럼 우러난 하늘에 옅은 파문이 일고
주름진 얼굴 한켠에 단단한 세월의 끈기가 묻어난다
오래전 비옥한 살갗에 묻어둔 항아리를 열면
생의 갈피마다 차곡하게 눌러 담은 추억들이 살아 숨쉬고
마당을 가득 메우는 사연에 은은하게 번져가는 미소
찬바람에 점성이 사라진 꽃잎이 야윈 두 볼에서 떨어지고
이마에 겹겹이 두른 금줄들이 절망의 파편들을 쫓는데
철없는 유년을 감싸던 울타리에 담긴 무수한 표정들이
흙냄새를 머금은 연잎을 타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밤
내 안에서 숙성된 계절의 향기가 환하게 피어날 때 쯤
나날이 발효되어가는 청춘에 코를 틀어막던 나도
주름에 음각한 시간의 순리를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강
눈 뜨는 자리마다 사라지지 않는 웃풍이 분다
붉어진 눈시울에 자라나는 수풀들 사이로
차가운 물살이 흐르는 할머니의 강을 들여다보면
초우가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가
얼음장 같은 눈가에 주저앉아 긴 낚시를 하고
빛바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
채 얼지 못한 상처들이 녹아 파문을 만들고 있다
깊은 기억 속에서 자꾸만 찌를 흔드는 바람은
해가 지나도 소식이 없는 재회가 보낸 안부일까
할아버지가 애써 잡히지 않는 꿈들을 낚는 동안
부레를 떼고 뭍으로 나온 유년은 물빛 나룻배에 올라
얽혀있는 주름의 지류를 따라 바다로 내려간다
검버섯 같은 연잎들이 물 고인 살갗에 뿌리를 내리고
낚싯대처럼 굽은 허리를 쥐고 가슴을 두드리는 할머니
퇴적된 시간을 지고 있던 눈꺼풀이 무너져 강을 메우고
턱밑까지 도달한 생애가 짠 빗방울을 떨구는데
낙화한 꽃잎을 태운 상여가 머나먼 강을 건너는 밤
메마른 얼굴마다 범람하는 강물이 향내 짙은 물길을 내고
자욱한 안개 섞인 위로가 연꽃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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